동화
“톡!”
넓고 넓은 들판 한 틈새에서 소리가 났어요.
“아! 아!”
바람결에 따라 기지개 켜는 소리도 났어요.
“허 그놈 잘 생겼네.”
억세지만 따스한 손길이 톨이를 만졌어요.
“아이, 좋아!”
톨이는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어요.
“올해는 풍년이 들겠군.”
손마디 굵은 아저씨가 말했어요.
푸른 들판은 끝이 없어요. 톨이는 눈을 들어 멀리멀리 바라보아요.
“와 끝이 안 보여.”
“당연하지. 이곳은 유명한 평야란다.”
큰 형이 말했어요. 형제들은 모두 한 줄기에 가지런히 매달려 있어요.
“여름을 잘 견뎌야 할 텐데...”
아저씨는 다시 한번 톨이 형제들을 쓰다듬어 주었어요.
“여름이 무서운가?”
톨이는 생각했어요.
“병충해가 괴롭힐 거야. 그것뿐인 줄 아니? 태풍은 얼마나 무섭다고... 하지만 걱정 마라. 내가 너희를 지켜줄 테니. 한두 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나만 믿으면 돼.”
아저씨는 톨이 형제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어요.
“무서운 것들이 많구나.”
톨이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어요. 아저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논에 나와 물도 대고, 김도 매며 톨이 형제를 돌봐줬어요.
뜨거운 여름이 되었어요. 해님이 화가 났는지 이를 드러내며 땅을 노려보아요. 그러자 물이 마르면서 논이 쩍쩍 갈라져요.
“아, 목말라...”
톨이는 목이 타서 어쩔 줄 몰라해요.
“얘들아 조금만 참아라. 내가 물을 주마.”
아저씨는 톨이 형제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양수기를 설치했어요. 아저씨의 얼굴과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르네요.
“아 맛있다!”
톨이는 맛있게 물을 먹었지만 충분하지 않아요. 하루 종일 양수기를 돌리느라 아저씨 얼굴이 더욱 검게 타 버렸어요.
툭!
“이게 뭐지?”
힘이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톨이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어요. 고대하고 고대하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예요.
“야 비 온다.”
톨이 형제와 아저씨는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해님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어요.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몰라요. 하늘에 구멍이 났나 봐요.
“이제 그만 와도 되는데...”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어요.
“얘들아 물이 차오른다. 맘을 단단히 먹고. 숨을 크게 쉬어...”
큰 형이 말했어요.. 며칠 동안 굵은 비가 내리더니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벼는 제법 키가 컸지만 물이 불어나면서 톨이 형제를 순식간에 덮쳤어요.
“아아! 숨을 쉴 수가 없어.”
톨이는 너무 힘이 들었어요. 노란 우비를 입은 아저씨도 톨이 형제를 돌보느라 힘이 다 빠져 버렸어요.
“얘들아 견디어야 해. 내가 옆에 있잖아!”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다행히 멈추었어요. 아저씨가 삽을 들고 이리저리 뛰면서 도랑을 터주는 바람에 톨이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어요.
또 한 번은 강이 넘쳐 붉은 흙탕물이 논으로 밀려든 적도 있어요. 톨이 형제들이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아저씨는 큰 한숨을 쉬었어요.
“아이고 자식들...”
아저씨는 톨이 형제를 자식이라고 불러요. 엄마가 아기 얼굴 닦아주듯 아저씨는 정성껏 톨이 형제를 세수시켜 주었어요.
어느덧 톨이 형제는 단단해졌고 벼이삭은 조금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어요.
“이번 태풍만 견디면 올 농사는 풍년인데...”
아저씨가 하늘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태풍이 뭐야?”
톨이가 물었어요.
“무서운 바람.”
큰 형이 대답했어요.
“모든 것을 휩쓸 만큼 힘이 엄청나. 다들 조심해.”
쭈그리고 앉은 아저씨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요. 드디어 태풍이 밀려오나 봐요. 천둥과 번개 소리가 요란해요. 힘센 바람결에 따라 벼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쓰러졌다 일어나요.
“모두들 꽉 잡아.”
톨이 형제는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꼭 잡았어요. 쓰러졌던 벼들이 다시 일어나면 바람이 다시 쓰러트리고 일어나면 또다시 쓰러트려요. 얼마나 힘이 쎈지 몰라요. 깜깜한 밤이 왔어요. 아저씨는 쉴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벼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를 묶어 주었어요.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바람도 잠잠해졌어요. 톨이는 허리를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바람을 견디지 못해 손을 놓친 형제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아요.
“태풍을 견디어 낸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아저씨는 힘이 다 빠져버린 손으로 허리를 주무르며 말했어요.
노란 가을이 왔어요.
톨이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어요.
상쾌한 가을 공기가 황금빛 벌판을 스치듯 지나가요.
높고 푸른 하늘, 실 같은 구름 사이로 바람이 불며 톨이를 간질여요.
“키드득.... 간질어...”
톨이는 몸을 꼬며 웃었어요. 그 바람에 형제들과 부딪쳤어요.
“부스스... 부스스...”
낱알들이 비벼대는 소리가 들렸어요.
“짹짹짹! 짹짹짹!”
저쪽에서 참새 소리가 요란하게 나네요. 참새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왔어요. 하늘을 덮을 것 같아요.
“저 녀석들이! 우리 자식을 먹으려고... 훠이, 훠이, 훠이!”
얼마나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지 아저씨 목이 다 쉬어 버렸어요.
아저씨는 소리를 치며 양손에 깡통을 들고 막 부딪쳤어요.
“깡깡깡, 깡깡깡, 깡깡깡!”
그 소리에 놀랐는지 참새들이 멀리멀리 날아가네요.
“이거 안 되겠다.”
깡통 소리를 내던 아저씨는 허름한 허수아비를 갖다 놓았어요. 노란 벌판에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는 꼭 그림 같아요. 파란 하늘아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톨이 형제는 튼튼한 볍씨가 되었어요.
조금 있으면 볍씨 형제들은 헤어질지도 몰라요. 운이 좋으면 끝까지 같이 가겠죠? 톨이의 끝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밥상에 놓이는 거예요. 숟가락으로 밥을 뜰 때 운 좋은 형제들은 한 숟가락 안에 들어가요. 그리고 서로 엉겨 붙어 맛있게 입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똘이와 형제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희는 그렇게 될 거야.”
허수아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정들었던 들판, 아저씨, 허수아비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톨이는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어요.
마침내 요란한 기계 소리가 났어요. 벼 베는 기계가 점점 다가왔어요. 톨이는 무서워서 눈을 감고 형제들 손을 꼭 잡았어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한 개의 낱알이 되어 톨이는 어딘가에 툭 떨어졌어요.
“후드득, 후드득, 후드득...”
비가 오듯 볍씨들이 줄줄이 떨어졌어요.
“와우, 드디어 자유로운 낱알이 되었다.”
“이젠 붙잡을 게 없어. 다들 정신 차리고 옆에 꼭 붙어 있어.”
큰 형이 말했어요.
“우리는 어디로 갈까?”
톨이는 생각했어요. 자루 속에 담긴 볍씨들은 어디론가 실려 갔어요.
“주르륵, 주르룩...”
아저씨는 볍씨들을 자루에서 쏟아냈어요.
“여기가 어디지?”
눈이 부신 듯 톨이는 실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어요. 논 근처의 아스팔트길이네요.
“와 아스팔트다. 근데 여기서 뭐 하지?”
“우릴 말리는 거야. 오래 보관하려고. 건강하게 잘 마르면 몇 년이고 끄떡없거든.”
아저씨가 볍씨를 넓게 펼치자 톨이 형제는 흥겨운 기분으로 햇볕을 열심히 받아들여요.
“잘 말라야 오래오래 갈 수 있단다.”
아저씨가 땀을 닦으며 말했어요. 아저씨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네요.
콧노래를 부르는 아저씨의 구릿빛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요.
“아저씨 기분이 좋은가 봐.”
톨이도 하늘을 향해 콧노래를 불렀어요.
며칠 동안 햇볕을 쐬면서 톨이는 잘 마른 볍씨가 되었어요.
“이 정도면 웬만한 습기나 추위에 끄떡없을 거야.”
아저씨 말을 듣고 톨이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얼마가 지났을까... 톨이는 형제들과 다시 자루 속에 들어갔어요. 이제는 휴식인가 봐요.
“이제부턴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야. 준비가 다 되었으니.”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며 느긋한 마음이 되었어요.
한 밤중이었어요.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벼 자루들이 경운기에 마구 실렸어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고 누군가 고함을 지르기도 했어요. 벼 자루를 집는 아저씨 손이 우악스러웠어요. 이렇게 힘이 들어간 아저씨 손은 처음이에요.
“어이쿠!”
잠에서 깨어 난 볍씨 형제들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껏 우리를 만져주던 손 하고는 달라.”
“그러게... 따스하게 돌봐 주던 손이 아니야. 막 집어던지잖아.”
톨이는 불안했어요. 벼 자루를 가득 실은 경운기는 덜덜거리며 어두운 길을 달렸어요. 얼마나 달렸을까요? 동이 터 오는데 경운기는 도시의 넓은 아스팔트길을 달리고 있네요.
“야! 도시다!”
볍씨들이 일제히 소리쳤어요. 도시는 처음 보거든요.
“어디론가 팔려 가는구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도시로 판다는 소리를 들은 한 친구가 말했어요.
“그럼 아저씨 하고 헤어지는 거네.”
톨이는 아쉬워 한숨을 쉬었어요.
“정미소로 가는 거야?”
누군가 물었어요.
“정미소는 시골에 있는데... 도시에 가려면 정미소를 거쳐야 해.”
“맞아... 이건 좀 이상한데.”
“볍씨가 그대로 도시로 가는 경우는 없어.”
불안한 마음이 생기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좀 침착해. 기다려보자. 무슨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큰 형이 말했어요.
경운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렸어요.
어딘가에서 멈췄는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네요.
아저씨는 톨이 형제를 담은 자루를 던졌어요.
쿵!
자루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벼 자루들이 한두 개가 아니네요.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와! 자루 엄청나다.”
그때 사람들 커다란 고함 소리가 톨이 귀를 아프게 했어요. 아저씨도 주먹을 불끈 쥐고 그 틈에 서 있었어요.
“쌀 개방 철회하라!”
“이게 무슨 소리야?”
톨이는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긴 한데 알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고, 서로 밀고 당기고 하더니 한 순간 퍽 소리가 나면서 쌀자루에 불이 붙었어요.
“앗 뜨거워!”
톨이는 소리를 지르며 아저씨를 바라보았어요. 이번에도 아저씨가 도와줄 거라고 믿으니까요. 힘들 때면 언제든지 달려왔잖아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냥 가만히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네요.
“아저씨... 뜨거워요!”
젖 먹던 힘을 내어 톨이가 외쳤어요.
“내 자식들...”
아저씨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어요. 몸이 뜨거워지면서 톨이는 아저씨와 견디어 낸 여름을 떠 올렸어요. 아저씨의 땀 냄새, 투박하지만 따스했던 손길, 참새를 쫓던 고함 소리가 가슴을 울렸어요. 연기에 가려 아저씨 얼굴이 점점 희미해졌어요.
“툭”
열기를 참을 수 없어 톨이는 팝콘처럼 터지고 말았어요.
“툭, 툭, 툭...”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가 났어요. 터진 자루 틈을 비집고 톨이는 하늘을 향해 날았어요. 달콤한 밥상을 기대했지만 왜 불에 던져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가슴이 답답하게 미어지는데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톨이를 덮쳤어요. 재가 된 톨이는 온 힘을 다해 아저씨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어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