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햇볕이 기웃거리는 한가로운 오후
응접실 한쪽에서 강아지가 꽃을 씹고 있다.
“아프지 않니?”
오물거리던 입을 잠시 멈추고 강아지가 묻는다.
“아니? 별로! 맛도 없을 텐데...”
강아지 입 안에서 꽃이 가느다란 소리로 말한다.
“맛? 그게 뭐라고. 난 못된 강아지야. 엄마한테 엄청 혼날 거야.”
“미안해. 그리고 고... 고... 마....”
꽃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다.
꽃향기가 응접실에 가득하다.
“아함! 잘 잤다.”
화병에 꽂혀 있는 예쁜 꽃이 기지개를 켠다.
“아 행복하다. 모두들 날 봐주고 예뻐해 주고 향기도 맡아주고. 정말 행복해.”
“그래?”
“어머! 깜짝이야.”
저쪽에 강아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넌 누구니?”
“이 집에 사는 강아지.”
“그렇구나. 난 막 도착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 넌 참 착하게 생겼다. 안 물지?”
“물기는... 난 아무도 안 물어.”
“그럼 짖기는 해?”
“응 당연하지. 낯선 사람한테는.”
“그렇구나! 잠깐 내가 행복하다고 했을 때 ‘그래?’ 하고 물어본 게 너야?”
강아지가 빙그레 웃는다.
“그래 나야. 왜?”
“응! 그건 마치... 내가 왜 행복한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거든.”
“넌 누구니?”
이번에는 강아지가 묻는다.
“난 꽃이야. 꽃.”
“꽃인 줄 알지. 그건 잘 알아. 하지만 들판에 있는 꽃은 아니잖아. 넌 도대체 어떤 꽃이야?”
“들판은 싫어. 지저분하고 무서워. 바람이 얼마나 많이 부는데. 금방 허리가 휘어버리는걸. 난 꽃인데... 아무렇게나 자란 막돼먹은 꽃이 아니야. 온실에서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꽃이야. 이렇게 향기도 내뿜고.”
“그렇구나. 그런데 왜 꺾이게 되었어?”
“나? 온실에서 자란 꽃들은 다 꺾이게 돼 있어. 그게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기도 해.”
“꺾이기를 바란다고? 말도 안 돼.”
“뭐? 말도 안 된다고? 왜 말이 안 돼? 우린 꺾여서 누군가를 위해 팔려 간단 말이야. 그럼 누군가는 우리를 보고 얼마나 행복해하는데.”
“난 꺾인 꽃 싫어.”
“왜? 예쁜 장식품이 돼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는데.”
“자기네 식으로 장식하고 자기네 식으로 향기를 맡는 거. 그게 행복한 것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면 안 될까?”
“그럼 우린 누가 봐주는데?”
“봐줘야만 해?”
“응, 난 누군가 봐줘야 해. 안 그러면 외롭고 서글프고 기운도 금방 떨어져.”
“네 옆에 많은 꽃들이 있을 거 아냐. 너희들끼리 놀면 되잖아.”
“난 그래도 누군가 감탄했으면 좋겠어. 와 예쁜 꽃이구나. 향기도 좋네. 집안 분위기가 확 사는구나. 이렇게 말이야. 나로 인해 그들이 행복하고, 그들이 행복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그게 잘못된 거야?”
“잘못되고 잘되고는 없어. 그냥 맘에 안 든다는 거지. 잘 생각해 봐. 네가 활짝 피었을 때는 어디에 있든 아름다워. 쓰레기 더미 속에 있어도 넌 예뻐. 어디에 있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난 쓰레기 싫어.”
“아무도 쓰레기 좋아하지 않아. 문제는 시들었을 때야.”
“난 시드는 거 싫어.”
“하지만 꽃은 시들게 돼 있어.”
“그래도 꺾여서 화병에 있으면 잘 돌봐 주니까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지.”
“시간은 벌 수는 있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는 시든 꽃이 되고 만다고.”
“그거야 뭐 모든 꽃이 그렇잖아.”
“바로 그거야. ‘모든 꽃은 아름답다. 모든 꽃은 시든다.’ 그런데 시들었을 때를 생각해 봐. 그냥 자연 속에서 핀 꽃은 시들었다가 말랐다가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난 사라지는 건 싫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싶어.”
“기억에 남더라도 언젠가 기억마저 사라지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무에 달린 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꽃이 사라진 자리에 열매가 남거든.”
“치! 꽃은 꽃이지 열매는 아니거든.”
“잘린 꽃이 시들면 어디로 가는지 알아?”
“글쎄... 뭐... 시들면 뭐든 끝이니까.”
“그렇지 않아. 꽃이 시드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야. 꽃이 시들지 않는다고 가정해 봐. 세상에 열매가 없을걸. 그들은 막 피어나 한참 아름다울 때 꽃을 꺾어다가 곁에 두고 싶어 해. 하지만 시들면 가차 없이 버려.”
“가차 없이 버린다고? 훌쩍, 그럼 난 어떡하지?”
갑자기 꽃이 울기 시작한다.
“훌쩍, 난 이미 잘린 꽃이야. 아! 불행해. 곧 쓰레기통에 던져지겠지. 열매도 못 맺고. 없었던 것이 되겠지. 난 태어난 것도 아니네. 그들은 금방 잊어버릴 거야. 솔직히 그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예쁘게 단장하고 향기를 날리고 그들 앞에서 뽐냈어. 날 봐주세요. 그리고 꺾어 주세요.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 봐. 훌쩍. 얼마 안 가서 쓰레기가 되어 한때의 화려했던 영광을 되새기며 눈물짓겠지.”
“울지 마. 널 울리려는 건 아니야. 그리고 그건 너의 선택이 아니었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랄까.”
“날 위로하려고 하지 마. 좀 전까지 행복했는데 네가 날 불행하게 만들었어.”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나도 마찬가지거든. 날 봐. 내 털은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자기들 마음이야. 깎고 다듬고 색칠하고. 그러고는 예쁘데. 나를 마구 씻기고는 자기들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대는데 미칠 것 같아. 난 원래 씻으면 안 되거든. 털에 좀 더러워서 벌레가 있어야 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냄새는 나한텐 너무 좋은데. 순전히 자기들 멋대로 생각해. 나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고.”
“훌쩍. 그럼 어쩌지? 시들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너무 불행할 것 같아.”
“글쎄, 어쩌겠나. 한창일 때 예쁘다는 소릴 더 많이 듣는 수밖에.”
“야! 정말 이러기야? 너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졌는데. 좀 도와줘.”
“솔직히 너를 위해 해 줄 것이 없네.”
강아지가 쓸쓸하게 말한다.
“사실은 나도... 너한테 투정을 부리지만 넌 진실이 뭔지 알게 해 줬어. 고마워. 하지만 나 역시, 너한테 바라기만 하고 널 위해 해 줄 것은 없어.”
“해 주기는 뭐... 이렇게 말벗만 돼줘도 어디야. 난 매일 이렇게 혼자거든.”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사이라면 우린 쓸모없는 사이인가? 그렇지만 넌 내가 생각을 바꾸도록 해줬잖아.”
한 줄기 바람이 분다.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문다.
“잠깐! 넌 꽃 좋아하니?”
“꽃? 당연히 좋아하지. 꽃을 좋아하지 않는 강아지는 없어.”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
“에이. 널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 당장 시들어 버릴 거야. 그럴 수는 없어.”
“아 그런 부탁 아니야.”
“그래? 그럼 뭔데?”
“날 먹어.”
“엥? 그게 무슨 말이야?”
“강아지는 고기도 먹고 잡곡도 먹는다며. 풀도 먹고. 난 풀은 아니지만 비슷하니까. 꽃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안 돼. 너처럼 예쁜 꽃을 어떻게 먹어.”
“예쁘다고? 고맙네. 난 이렇게 예쁠 때 사라지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잠자코 있다가 마르면 돼. 그들이 알아서 할 거야.”
“나도 알고 있어. 난 재활용도 안 되거든. 가장 처치 곤란한 게 꽃다발이래. 그들이 하는 말 들었어. 우린 싱싱할 때 반짝하고 끝나는 거야. 난 쓸모없는 때를 기다리기 싫어. 네가 도와줘.”
“어.. 어떻게 도와?”
“그러니까 날 먹어. 날 없애 버리라고. 넌 내가 눈을 뜨도록 해 줬어. 넌 내 친구야. 솔직하게 말해 줬잖아. 그게 친구가 아니고 뭐야? 네가 날 먹어 버리면 난 하나도 슬프지 않을 거야. 친구. 부탁이야. 제발 들어줘.”
햇볕이 기웃거리는 한가로운 오후
응접실 한쪽에서 강아지가 꽃을 씹고 있다.
“아프지 않니?”
“아니? 맛도 없을 텐데...”
“괜찮아. 난 못된 강아지야. 엄마한테 엄청 혼날 거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강아지의 입에서 꽃이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난 꽃을 먹는 강아지가 되고 말았어. 저번에도 먹었거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