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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나무와 딱따구리

동화

by 인산

서정동산 저 멀리 아득히 높은 산이 불쑥 솟아 있어요. 그 산은 높고 높아서 산봉우리는 언제나 하예요. 그 높고 높은 봉우리 아래 울창한 숲이 있어요. 여름에는 푸르고 푸른 융단 같아서 그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예요. 어스름히 동이 터오면 이슬을 머금은 숲은 뽀얀 안개를 품어내기 시작해요. 증기 기관차가 연기를 품어내는 것처럼... 그때가 되면 숲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요. 나무들은 요란하게 치장을 하고요.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아침 이슬을 받기 위해 나뭇잎을 잔뜩 풀어헤치고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흔들어대죠. 그 소리에 단잠을 자던 새들도 깨어나고요.

"푸드덕... 푸드덕... 푸드덕..."


박새, 큰 유리새, 흰 배지빠귀, 비둘기... 수많은 새들이 날개를 펼치고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요란한 소리가 숲 속에 메아리쳐요. 새들이 안갯속을 헤엄치는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안개님!”

“응! 그래, 잘 잤니?”


가만히 눈감고 생각을 해 봐요. 새들이 인사하는 모습을. 새들이 날개 짓을 할 때 춤추며 흩어지는 뽀얀 안개 자락을...


이렇게 숲은 아침을 시작해요. 잠깐 빠진 게 있어요. 아침을 깨우는 소리 가운데 가장 커다란 소리는 뭐니 뭐니 해도 딱따구리 소리예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 말이죠.


"따다 다닥, 딱 딱딱딱... 따다 다닥... 딱 딱 딱 딱..."


딱따구리는 왜 나무를 쪼아 댈까요? 나무한테 해를 입히는 건 아닐까요? 글쎄, 지금부터 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대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숲 속에는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들이 곧게 뻗어 있어요. 빽빽한 나무 사이로 조그만 공터가 있는데 거기에 둥그런 모양의 귀여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요. 어린 둥근 나무는 새침데기인 데다 잘난 척하는 편이에요.


“아이, 졸려. 저리 좀 비켜줄래? 너희들 때문에 밤새 머리가 다 헝클어졌어.”


둥근 나무는 세 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머리가 망가진다는 것이에요. 둥근 나무는 이슬을 찍어 머리를 매만지며 열심히 단장해요.


“참 귀엽다.”


튼튼한 나무들이 둥근 나무를 바라보며 칭찬해요. 단아하고 깨끗한 모습이 보기에 좋았거든요.


“고마워!”


둥근 나무는 살며시 눈을 깔며 조그만 소리로 말해요.


"따다 다닥, 딱 딱딱딱... 따다 다닥... 딱 딱 딱 딱..."


어느 날 딱따구리 소리가 작은 공터에 메아리쳤어요.


“아야, 아이 아파... 누구니?”


둥근 나무는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 자기의 연약한 살을 막 쪼고 있었기 때문이죠. 둥근 나무는 눈에 힘을 주고 얼른 쳐다봤어요. 화가 잔뜩 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둥근 나무 몸을 사정없이 쬬아대고 있었어요.


“그만할 수 없어? 쪼그만 한 게.”


딱따구리는 둥근 나무 짜증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없이 계속해서 나무를 막 쪼아댔어요.


“아프다니까... 내 피부 다 망가지잖아. 그만해 당장!”


둥근 나무가 소리를 꽥 질렀어요.


“따다 다닥... 그만둘 수 없어.”

“뭐라고?”

“딱딱딱... 화가 나서 그만둘 수 없다고...”

“왜 화가 나는데?”


딱따구리는 쪼아대던 것을 멈추고 둥근 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봤어요.


“다른 새들이 나랑 안 논대.”

“왜?”

“내가 이상하데.”

“뭐가?”

“내 발가락 두 개가 앞쪽을 향한대.”

“뭐라고?”


둥근 나무는 얼른 딱따구리 발을 쳐다봤어요. 아닌 게 아니라 발가락 두 개가 앞쪽을 향해 있었어요. 다른 새 같으면 발가락 세 개가 앞쪽을 향하거든요. 잘 모르겠다고요? 그럼 얼른 확인해 봐요. 아무튼... 딱따구리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날 놀리는데 화가 안 나겠어.”

“근데 왜 발이 그렇게 생겼니?, 풋”


둥근 나무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어요.


“너도 웃잖아! 에이... 따다 다닥, 딱딱딱...”


딱따구리는 다시 둥근 나무를 세차게 쪼기 시작했어요.


“아야, 아얏, 미안, 미안하다고...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쪼면 어떡해?”

“집에 와서 친구들이 놀린다고 엄마한테 말했지. 따다 다닥... 근데 이번에는 엄마가 밥을 안 주는 거야. 화를 참을 수 있겠어. 집에서 뛰쳐나왔지. 에이 딱딱딱... 딱딱딱...”

“정말 화나겠다. 엄마까지 그러면...”

“그러니 너한테라도 화풀이를 할 수밖에.”

따다 다닥, 딱 딱딱딱... 따다 다닥... 딱 딱 딱 딱...

“아야, 아야, 아프다! 좀 살살해.”


딱따구리 부리가 얼마나 센지 둥근 나무에 금방 구멍이 나고 말았어요. 둥근 나무는 자기 몸에 구멍이 난 것을 보자 갑자기 울고 싶어 졌어요. 깨끗했던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생각해 봐요. 슬프지 않겠어요? 둥근 나무도 화가 났어요.


“제발 그만. 다른 데로 가 주지 않겠니? 너 같은 애 너무 싫거든. 내 뽀얀 피부를 왜 망가뜨리는 거야?”

“싫어! 안 가.”

“안 간다고? 참 웃긴다. 발가락도 그렇지만 넌 꼬리도 너무 억세고, 앉는 것도 이상해. 다른 새들은 수평으로 앉는데 넌 수직으로 앉잖아.”

“뭐라고?”


딱따구리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는데 둥근 나무마저 놀리잖아요. 화가 난 붉은 얼굴로 다시 나무를 쪼으려는데 구멍 속에 여러 마리의 벌레와 유충들이 보였어요. 바구미, 풍뎅이, 노린재... 이것저것 많기도 하네요. 딱따구리는 피식 웃었어요.


“왜 웃니? 난 지금 심각한데.”

“네 피부가 겉으로야 깨끗할지 몰라도 속으론 형편없다.”

“웃기지 마. 다들 예쁘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좋아... 그럼 난 다른 데로 갈 테니까... 잘해 봐. 너 아니면 없는 줄 알아?”


맛있는 먹이가 아깝기는 했지만 딱따구리는 옆에 있는 튼튼 나무로 날아갔어요. 그리고 그곳에 구멍을 파고 둥지를 만들었어요.

얼마 안 있어 둥근 나무속에 숨어 있던 벌레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무껍질을 파헤치기 시작했지요. 어디서 왔는지 딱정벌레와 개미도 합세했어요. 둥근 나무는 몸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휴 가려워. 어쩌지? 몸이 다 망가지겠어. 너무 가려워...”

벌레들이 떼로 몰려오자 둥근 나무의 곱던 껍질은 금방 흉측해졌어요. 수액이 줄줄 흘렀고 갉아 먹힌 껍질들은 폐허가 되었어요. 둥근 나무는 울상이 되었어요. 아침마다 곱게 단장한 것도 허사가 되었고, 멋진 몸매를 뽐낼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요. 속이 상해서 훌쩍거리고 있는데 튼튼 나무가 말했어요.


“딱따구리를 쫓아내지 말았어야지.”

“엉? 뭐라고? 훌쩍!”

“딱따구리를 쫓아내지 말았어야지.”

“왜? 얼마나 아프게 쪼아댔는데... 머리까지 울려서 혼났어.”


둥근 나무는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돌렸어요.


“딱따구리는 우리의 친구야.”

“뭐? 친구라고?”

“그럼, 친구지...”

“아프게 하는 게 친구야?”

“그건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벌레를 잡아먹으려는 거야.”

“무슨 말이야?”


둥근 나무는 눈물을 훔치며 물었어요.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아프게 쪼아대고 피부를 상하게 하는 딱따구리가 친구라니.


“내 말 들어봐. 우리 몸속에는 벌레들이 많아. 그건 약을 쳐도 죽지 않아. 그런데 딱따구리는 우리 몸에 구멍을 파고 길고 가느다란 혀를 집어넣어 벌레나 유충을 잡아먹지. 그 대신 우리는 딱따구리한테 둥지를 제공하고. 그게 친구지 뭐야? 딱따구리는 숲 속의 외과의사야...” 튼튼 나무가 길게 설명했어요.


“그래도 그 애는 이상해. 발가락도 그렇고, 앉는 자세도 그렇고...”

“하하하... 하하하...” 튼튼 나무는 큰 소리로 웃었어요.

“그게 바로 우리한테 도움을 주기 위해서야.”

“뭐라고? 어째서?”

“숲 속에서 딱따구리는 수직으로 앉는 단 한 마리의 새야. 그래서 우리 몸에 구멍을 뚫을 수 있고 벌레도 잡을 수 있는 거지.”


둥근 나무는 입을 다물었어요. 이제야 이해를 하게 된 것이지요.


“내가 딱따구리 보낼 테니 잘 사귀어 봐. 저번처럼 싸우지 말고.” 튼튼 나무가 타이르듯 말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좀 있다가 딱따구리가 왔어요. 그것도 두 마리나. 벌써 딱따구리가 친구를 사귀었나 봐요.


“와 여기 먹을 게 엄청나다.”

“슈퍼마켓이네.”

“구멍도 있어.”

“아 그거... 내가 저번에 파 놓은 거야.”


두 마리 딱따구리는 잔치 상을 받은 것처럼 배불리 먹었어요. 딱따구리는 기분이 좋아지자 나무를 쪼기 시작했어요.

"따다 다닥, 딱 딱딱딱... 따다 다닥... 딱 딱 딱 딱... "


그러자 둥근 나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뭐랄까? 너무너무 시원했거든요. 온몸이 시원할뿐더러 머리도 개운해졌어요. 원래 둥근 나무는 두통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딱따구리가 단단한 주둥이로 쪼아주자 신기하게도 두통이 사라졌어요. 둥근 나무는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청명한 가을이 되었어요. 둥근 나무 딱따구리 부부가 알을 낳았는데 어느새 새끼가 태어났어요. 얼마나 귀엽던지. 새끼가 놀랄까 봐 둥근 나무는 머리를 빗을 때도 다소곳이, 바람이 불 때도 조심해서 잎을 흔들었어요.

한 번은 깊은 밤인데, 두런거리는 소리에 둥근 나무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딱따구리 부부가 자지 않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보, 내일부터 아이한테 먹이를 주면 안 돼.” 아빠 딱따구리가 말했어요.

“마음이 아파요.” 엄마 딱따구리는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그게 자식을 위하는 일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옛날 생각이 나는군.” 아빠 딱따구리는 먼 산에 걸린 보름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어요.

“엄마가 밥을 안 줘서 너무너무 화가 났었거든.”

“후후, 깊은 뜻이 있다는 걸 몰랐군요?” 엄마 딱따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알 턱이 없지. 그래서 화난 김에 집을 뛰쳐나와 나무를 사정없이 쪼아댄 거야. 그랬더니 금방 구멍이 생기고 그 속에 먹을거리가 엄청난 거야.”

“이제 우리 아이 차례네요. 잘 해내야 할 텐데...”

둥근 나무도 옛날 생각이 났어요. 딱따구리가 처음 왔을 때 말이죠. 그때 왜 그렇게 딱따구리가 화가 났었는지, 자기를 아프게 쪼아댔는지 알 것 같았어요. 둥근 나무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부스스한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어요.

깊은 밤, 둥지에서는 딱따구리 부부가 두런거리고 둥근 나무는 옛날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처에서 부엉이 아저씨가 눈에 불을 켜고 길게 울었어요.

부........... 엉.........., 부............ 어............ㅇ

부........... 엉.........., 부............ 어............ㅇ


지금 둥근 나무 피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요? 그 사이 둥근 나무는 키도 훌쩍 크고 피부도 단단해져 튼튼 나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어요. 보기에 듬직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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