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텔레비전에서 매시간 태풍 소식을 전합니다. 채널을 돌려도 같은 이야기만 합니다. 같은 색 잠바를 입은 아저씨들이 어떻게 태풍을 대비해야 하는지 설명해 줍니다.
“태풍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영수가 묻습니다.
“그럼 무섭지. 바람이 엄청 세고, 비도 엄청 내리거든. 이번 태풍은 몇십 년 만에 오는 큰 태풍이래. 큰 피해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엄마가 걱정스럽게 말합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해?”
“우리 같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야... 그냥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아. 괜히 나갔다가 물에 휩쓸리거나 바람에 휘릭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부는 배를 단단히 매야 하고, 농부는 논에 물이 잘 빠지도록 손 봐야겠지.”
“베란다 유리창은 괜찮아? 텔레비전에서는 테이프를 붙이라고 하던데.”
“글쎄... 바람이 워낙 세면 유리창도 날아갈 수 있으니깐. 대비하면 좋겠지. 왜 걱정되니?”
“응! 좀 무서워.”
하늘이 잔뜩 흐려 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바람도 불기 시작합니다.
“야! 비 온다.”
영수는 비 오는 것이 좋습니다. 비가 오면 왠지 마음도 촉촉해집니다. 소리 없이 내리던 비가 후드득후드득 큰 빗방울이 되어 세차게 내리기 시작합니다. 바람도 거세집니다.
“태풍이 오나 보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바람 소리와 빗소리가 엄청납니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고 비가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영수는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송에서도 이렇게 위력적인 태풍은 오랜만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집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어떤 집은 물이 넘쳐흘러 집 안 까지 들어옵니다. 모든 것이 거대한 태풍 앞에서 벌벌 떨며 웅크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소리가 귓가를 때립니다. 엄마 아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습니다. 영수도 엄마 무릎을 베고 자다 깨기를 반복합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이 꺼졌습니다. 거실의 불도 나갔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져 버렸습니다. 아빠가 얼른 베란다로 나갑니다.
“아이고. 아파트 전체가 깜깜하다.”
“전기가 나갔나 봐.”
영수는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어떡하지?”
아빠가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립니다.
“초는 찾았는데 성냥 있어?”
“없어. 당신 담배 끊는다고 라이터 다 버렸는데.
“그래? 그럼 가스 불에라도 붙여야지.”
아빠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를 켭니다.
탁.. 탁...
연이어 소리가 들리지만 불이 붙지 않습니다.
“어 어... 이것도 안 켜져.”
“정말! 큰일이네. 냉장고도 그렇고...”
“나 엄마 아빠랑 잘래.”
영수는 오랜만에 엄마와 아빠 사이를 파고들었습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큰 소리가 들렸지만 엄마 아빠랑 함께 있으니 무서움이 가라앉습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거 얼마 만이야?”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러게. 혼자서 잔다고 가버렸잖아.”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영수는 잠이 들었습니다. 태풍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풍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시뻘건 물이 도로에 가득 찼고 자동차들도 반쯤 물에 잠겼습니다. 담이 무너진 집도 있고 저 아래쪽 집은 방안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주차장에도 흙탕물로 가득합니다. 부러진 나무는 뼈마디를 내보이며 바닥에 누웠고 휘어진 간판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도로에는 곳곳에 웅덩이가 파였습니다.
영수네 아파트도 말이 아닙니다. 주차장에 나무들이 쓰러져 차들과 뒤엉켜 있습니다. 지하실에는 물이 차서 주민들이 물을 푸러 갑니다. 아빠도 물통을 들고나갔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엄마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이 상할까 걱정입니다. 세탁기도 선풍기도 에어컨도 켤 수 없습니다. 영수도 전기의 위력을 알았습니다. 컴퓨터도 할 수 없고, 텔레비전도 볼 수 없고, 폰도 충전할 수 없습니다.
“참! 안 되지!”
컴퓨터를 켜려다가 영수는 멈춥니다.
“게임을 할 수 없잖아!”
영수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영수는 그냥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뭐 하지?”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카톡이나 할까? 단톡방에 들어가 친구들을 불러 봅니다. 카톡이 먹통입니다. 폰이 아예 되지 않습니다.
“엄마 폰이 왜 이래?”
“응 내 폰도 그래.”
“원래 정전되면 폰도 안 돼?”
“글쎄 나도 모르겠다.”
영수는 폰을 던지듯 한쪽으로 밀어 놓습니다.
“뭐 하지? 할 일이 없네.”
지하실 물을 푸러 갔던 아빠가 돌아왔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물을 다 빼려면 아직 어림없는데. 안 하던 짓 하려니까 힘들어... 좀 쉬었다 가야지.”
아빠는 바로 소파에 누워버렸습니다. 아빠는 엄마를 불렀습니다.
“여보 내 폰 어딨어?”
“당신 폰 꺼졌어.”
“아 그래? 우리 보조 배터리 없던가?”
“없지... ”
“어! 어쩌지.”
아빠는 누우면 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일이었지만 이젠 그냥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엄마도 부엌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영수도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영수는 거실로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피아노 뚜껑을 열었습니다.
“피아노 치게?”
엄마가 말했습니다. 영수는 대답 대신 건반을 눌렀습니다.
“영수야!”
아빠가 불렀습니다.
“응!”
“우리 아들 뭐 해?”
“그냥...”
“이리 와서 아빠 허리 좀 밟아줄래? 허리가 삐었나? 너무 아프네.”
“...”
영수는 가만히 있습니다. 아빠 허리를 밟아본 적이 아득합니다. 어렸을 때는 곧장 밟았었는데.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여보 부엌에 가스가 안 들어와. 밥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영수야 배고프지?”
엄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습니다.
“전기도 나가고 가스도 안 돼.”
엄마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짜장면 시켜 먹을까.”
아빠가 허리에 손을 얹고 일어납니다.
“전화 돼?”
“참 그렇지. 어떡하지?”
엄마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영수의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납니다. 아빠가 부스스 일어납니다.
“아이고 허리야. 잠깐 있어봐.”
아빠가 다용도실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가져옵니다. 휴대용 가스버너와 휘발유 버너를 들고 왔습니다.
“이거라도... 이걸로 해 먹자.”
“부탄가스 없어. 몇 년 동안 안 썼잖아. 제 1학년 때 동해안에 놀러 가서 텐트 친 게 마지막인데.”
“그래? 그럼 이 버너라도. 다행히 휘발유는 있네.”
아빠가 버너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습니다.
“와 불붙었다.”
영수가 신기한 듯 아빠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거 얼른 먹어야 해.”
엄마가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몽땅 끄집어냅니다. 삼겹살, 소시지, 달걀, 두부 등등...
“잠깐 순서대로. 일단 삼겹살을 구울 테니깐 채소를 씻어. 나머지는 넣어 놔. 아직은 냉장고 안이 시원하니까.”
아빠가 말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군. 집안에서 버너를 다 켜고.”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점심을 준비합니다.
“아니 왜 신문지 깔아? 식탁에서 먹어야지.”
엄마가 의아해합니다.
“버너는 신문지가 제맛이야.”
아빠가 좀 신이 난 것 같습니다. 버너에 밥하고 삼겹살 굽고... 신문지 위에 식탁을 차립니다. 거실에 둘러앉아 식사를 합니다. 영수도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캠핑 온 거 같다. 그치?”
아빠가 말합니다.
“좀 색다른데?”
영수가 말했습니다. 거실에서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은 건 처음입니다. 엄마도 거듭니다.
“좋기도 하겠다.”
엄마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게 뭐 왜 이리 복구가 늦어? 빨리빨리 해야지.”
아빠가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어휴 답답해. 인터넷도 안 되고 텔레비도 볼 수 없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네.”
영수도 머리가 복잡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내일 학교는 어떡하지?”
영수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가 말합니다.
“이렇게 복구가 늦어지면 휴교할 수도.”
“회사는 어쩌나? 출근을 하긴 해야 하는데. 차들이 다닐 수 있을지 몰라. 내일까지는 물이 빠지겠지?”
“물은 금방 빠지는 데 도로에 싱크홀이 여기저기 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이 중요하니까. 다시 내려가 봐야겠다. 눈치가 보여서 원.”
아빠는 물통을 들고나가려고 합니다.
“허리 괜찮겠어? 조심해 여보!”
엄마가 걱정스럽게 말합니다. 영수는 방에 들어가 멀뚱멀뚱 서성입니다. 책을 읽다가 금방 집어던집니다. 책꽂이에 가족 앨범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거나 볼까?”
영수는 앨범을 펼칩니다. 앨범에는 엄마 아빠 결혼식 사진부터 영수가 태어나서 찍은 사진, 유치원 사진, 여행 간 사진들이 들어 있습니다. 영수는 오랜만에 보는 사진들이 신기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와 아빠가 행복해 보입니다.
잠시 후 아빠가 거의 쓰러지듯 들어옵니다.
“어휴 허리야! 내가 하는 거 보더니 사람들이 그냥 들어가래.”
아빠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버렸습니다. 영수가 앨범을 들고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빠 허리 많이 아파? 밟아줄까?”
“어? 그럴래? 그래. 좀 밟아주라.”
소파에 엎드린 아빠의 허리를 살살 밟습니다. 아빠 허리가 제법 굵은 것 같습니다.
“아빠 허리 몇이야?”
“왜?”
엄마가 웃습니다.
“아빠 뱃살이 장난 아니거든. 넌 나중에 그렇게 되면 안 돼.”
“아야야야야. 야 거긴 아프다. 그래 거기.”
영수가 조심스럽게 아빠 허리를 밟습니다.
“야 너 다리 힘이 세졌다. 하긴 5학년이면 다 컸지 뭐.”
“나? 6학년인데?”
“....”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아이고 허리가 아프니 아들 학년도 헷갈리네. 암튼 다리 힘 좋다. 이젠 네가 아빠 책임져라.”
“크긴 뭘. 아직 애지.”
엄마가 말했습니다.
“내가 애라고?”
“아이고 허리야. 야 너무 세게 밟지 마.”
“아차 아빠 미안. 나 애 아니거든.”
영수가 허리를 밟는 사이에 잠깐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 네 아빠는 참 대단해. 그 사이에 잠드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거야.”
저녁이 되자 다시 버너에 불을 켰고 세 식구는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
“굶기야 하겠어?”
“모르지. 전기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을걸.”
“아까 옆집에서 다녀갔는데, 빵 가게에 빵이 동이 났데.”
“그럴 만 하지.”
영수는 버너에 한 밥이 참 맛있습니다. 더 어두워지자 엄마가 초를 찾아옵니다. 세 식구는 초 옆에 앉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각자 폰이나 텔레비전을 봤을 테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습니다. 멀뚱멀뚱 옹기종기 앉아 있습니다.
“저...”
침묵을 깨려고 아빠와 영수가 동시에 말합니다.
“뭐? 무슨 말하려고?”
“아냐. 아빠가 먼저 말해.”
“왜 그래? 너도 뭔가 말하려고 했잖아.”
“아니 그냥... 좀 이상하다고. 이렇게 있으니깐.”
“나도 그래. 이게 얼마 만이야. 당신 회사 옮기고 항상 바쁘다고 그러지. 영수는 학교, 학원 다니느라 얼굴 볼 새도 없지. 전기가 나가니까 좋네. 오랜만에 남편하고 아들하고 함께 있으니까.”
엄마의 웃는 모습이 진심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는 전기 나가서 좋다고 그러지 마. 다들 난리야.”
“내가 바보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나도야.”
영수가 말했습니다.
“뭐가 나도야?”
“엄마 아빠랑 함께 있으니깐 이상했는데, 지금은 좋아.”
영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수시로 아빠 어깨도 주물러주고 허리도 밟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빠 허리를 밟았을 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너로 한 밥을 한입 떠서 입에 넣었을 때 밥맛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뭔가 말할 수 없는 어떤 계곡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 앨범 볼래?”
“앨범?”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물었습니다.
“응 여기.”
영수가 앨범을 밀었습니다.
“가만 이거 언제 만든 거지? 요즘엔 통 사진을 인화하질 않으니.”
아빠가 얼른 앨범을 엽니다.
“야 너 태어난 날이다.”
“아이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너네 아빠는 그때 병원에 없었어.”
“아 또 그 얘기.”
“저 봐. 그 얘기만 하면 발뺌을 한다니까. 나 혼자 밤새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출장 중이었잖아.”
“아니 그날 나오는 것 뻔히 알면서 출장을 간 사람이 문제지.”
“회사에서 가라는데 어떻게 안 가?”
갑자기 엄마 아빠가 싸우는 분위기입니다.
“앨범 덮을까?”
영수가 눈치를 보며 말합니다.
“아냐 같이 보자. 여보 미안.”
“진짜? 그것 가지고는 안 풀리는데.”
“진짜 미안. 영수야 네 생일 때만 되면 엄마는 아빠를 싫어해.”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알았어. 알았다고. 미안.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그만 못해. 앞으로 제 장가갈 때까지는 제 생일날마다 잔소리할 거야.”
“알았어. 잔소리해. 영수야 넌 절대 그럼 안 된다.”
“뭐? 잔소리?”
“아니, 네 각시가 애를 낳으면 모든 것 제쳐 두고 병원에 있으라고.”
“당연히 그래야지.”
엄마는 여전히 화난 표정입니다.
“야 여기가 어디지? 물 좋네.”
아빠가 얼른 앨범을 넘깁니다.
“영수야! 넌 친구 많아?”
아빠가 묻습니다.
“잰 친구밖에 없어.”
엄마가 말합니다.
“누구랑 제일 친해? 여자 친구도 있어?”
아빠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묻습니다.
“...”
촛불이 더욱 밝아집니다. 엄마도 바닥에 눕고 영수도 눕습니다. 셋이 나란히 팔베개하고 누웠습니다.
“저기 좀 봐라! 베란다 저쪽!”
태풍이 지나간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반짝입니다.
“야 우리 아파트에서도 별이 보이네.”
“몰랐어.”
“나도. 처음 보네.”
“아파트가 항상 밝아서 별들이 숨어 있었던 거지.”
“아파트에 불이 나가니깐 별들이 찾아온 거네.”
엄마가 촛불을 끕니다. 그러자 별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엄마와 아빠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영수는 별들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야! 정말 태풍 덕분에 별도 보고 우리도 함께 있네.”
“이거? 태풍이 준 선물이야.”
영수의 귀에 어렴풋한 별들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