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없지만 한국에 가기는 싫어
혼자 하는 도피 여행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물가 저렴한 동남아에선 현지인 길거리 맛집들을 전전하며 하루에 만원 이상 쓴 날이 손에 꼽을 만큼 거진 로컬처럼 지냈고, 중국남방항공의 LA 취항 기념으로 풀린 특가 티켓에 홀려서 떠난 2주간의 미국 여행에선 하루에 딱 한 끼만 먹으며 총 150만 원도 쓰지 않았다.
비록 여행이라기엔 생존기에 더 가까웠고, 남들이 맛있는 음식 사먹을 때 소식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구질구질하고 짠했던 시간도 많았지만, 꽤 오랜 시간 방구석에 박혀서 공부만 했던 과거를 가진 나에게는 한국 밖 세상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낯선 자극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돈을 덜 쓰고 오래 떠돌아다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LA에서 다른 도시도 가보고 싶었던 나는 치안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미국 노숙자들이 장거리 이동 때 탄다는 그레이하운드 시외버스를 탔다. 이왕 돈 좀 아껴보자고 위험한 도전 하는거, 아예 심야 버스로 예약해서 숙박비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면서 지역이동도 하고 돈도 굳고 일석이조 아닌가!
LA 버스 터미널은 난동꾼 무리 때문에 조금 무서웠지만 막상 버스에 타고나니 다행스럽게도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분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고, 덕분에 샌드위치도 먹으며 신변 걱정 없이 9시간을 달려서 해도 아직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호스텔까지 가려고 우버를 켰더니, 맙소사. 야간 할증이 붙어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심야버스까지 타고 9시간을 달려온 끝에, 고작 15분 거리의 택시비로 이만큼의 돈을 써버리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무의미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24인치 캐리어를 덜덜 끌며, 목적지에 한 블록씩 가까워질 때마다 혹시라도 운임이 조금 내려가진 않을까 기대하며 우버 앱을 계속 새로고침했다.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상점 유리를 부수고 있던 거리도, 끝이 보이지 않는 노숙자들의 텐트촌도 조용히 가로질러,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더니 이미 호스텔에 도착해 있었다.
열아홉.
나는 어렸고, 순진했고, 용감했고,
강도 한 번 안 당한 걸 보면 운도 참 좋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수능 준비를 하러 한국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은 잠시 뒤로 미뤄둔 채, 1년간 해외 여기저기를 떠돌며 방황했다.
홍콩에서의 좋았던 기억 덕분에 이후로 어느 도시를 가든 늘 호스텔을 선택했다. 그날그날 새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일부러 여행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래야 낮엔 그들이 미리 짜둔 일정에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도착과 출발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은 그렇게 새로 만난 전 세계 친구들과 도시를 구경하며 보냈고, 밤이면 호스텔 공용 공간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맥주 한 캔씩 들고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국에서 내 진로 고민을 묵묵히 듣던 독일 친구가 말했다.
“굳이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유학을 가보는 건 어때? 우리나라는 외국인도 학비 거의 안 내. 공립대면 무료인 데도 많아.”
’독일?‘
나의 현실 도피는 조금씩 목적지를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