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의 호주 정착기
태국 여행 중 만난 독일인 친구의 “독일은 학비가 무료야”라는 말에 혹해 유학을 알아봤지만, 역시 유학이란 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학비가 무료인 과정은 현지 언어가 필수였고, 영어로 수업하는 곳들은 우리 형편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요구했다.
그래서 일단 영어권 국가로 워홀을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유학 자금을 모으고, 영어도 더 익히면서 독일 유학의 방향을 조금씩 그려나갈 생각이었다.
난 한 번도 호주에 대해 환상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캥거루와 코알라가 전부였고 솔직히 호주보다는 캐나다에 더 가고 싶었다.
하지만 추첨제로 비자를 발급하던 캐나다를 마냥 기다리자니 더 이상 도피 여행에 쓸 자금도 없었거니와,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대학 새내기가 된 친구들의 행복해 보이는 삶이 나를 너무도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워홀계의 양대 산맥이던 호주와 캐나다에 거의 동시에 비자를 신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에서 먼저 비자가 나왔다.
2017년, 그 시절 호주 워홀러들의 꿈은 ‘주 1000불’이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워홀러들은 시티 중심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일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시 외곽의 농장이나 공장으로 향했다.
호주인들이 꺼리는 일을 맡아 묵묵히 일하는 한국 청년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마주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자신 있었다.
1년간의 배낭여행에서 다져진 영어 회화 실력으로 일자리 하나쯤은 금방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큰소리치던 1주, 2주가 지나고 나서야 경력 없는 외국인을 선뜻 받아주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지갑은 점점 가벼워졌고, 마음은 그만큼 무거워졌다.
나는 호스텔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말라붙은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우유 한 컵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발 닿는 대로 이력서를 돌린 지 3주쯤 지났을까,
시티 중심 밀스트릿에 위치한, 브루나이계 호주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서 드디어 첫 연락이 왔다.
최저 시급이던 20불도 채 주지 않는 세금도 떼지 않던 불법 캐시잡이었지만, 절박했던 내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사람답게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다.
그렇게 3평 남짓한 작은 카페는 내 첫 직장이 되었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정들었던 호스텔을 떠나 이스트퍼스의 낡고 오래된 2인 1실 룸쉐어로 이사도 했다.
문제는 출근 시간이었다.
새벽 4시 반에 문을 여는 카페의 오픈 시간에 맞춰서 도착하려면 적어도 3시 반까지는 일어나야 했다.
룸메이트를 깨우지 않으려고 출근할 때 입을 옷을 미리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진동으로 맞춰둔 알람 소리를 놓칠까봐 자기 전 핸드폰을 소매 안에 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곤 새벽에 조심조심 일어나 물소리가 새지 않도록 수도를 살짝 틀고 양치질을 했다. 세수도 못한 채 눈곱만 떼고 집 밖으로 나섰다.
버스조차 다니지 않던 이른 새벽.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켜진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바나나 하나를 입에 쑤셔 넣으며 30분을 걸었다. 그렇게 매일 새벽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굿모닝!”
“오늘 머핀 완벽하게 구워졌네!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 시작할 수 있겠어.”
“Hi Kim, 오늘 표정 좋아 보이네, 무슨 즐거운 일 있어?”
호주는 참 신기한 나라다.
피곤함이 가득할 법한 이른 새벽에도, 사람들은 매일같이 환한 웃음으로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밝은 에너지는 어느새 나에게도 스며들었고, 나 역시 미소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단골손님들의 이름과 커피 취향이 어느새 익숙해졌고, 낯설기만 했던 그들과 스몰토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갔다.
사장님은 매일 아침, 내 라떼 위에 작은 그림을 그려 주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새벽 4시부터 아침 9시.
아침 햇살이 퍼스 빌딩 숲을 환하게 내리쬐던 퇴근길.
각 잡힌 정장을 입고 바쁘게 출근하는 회사원들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들처럼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조금씩 내 마음속에도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