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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래 봬도 결혼식 두 번한 여자야.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

by 꽤 괜찮은 사람

“곰보다는 여우가 좋단다.”
뚱하게 참고 있는 것보다는 싹싹하게 여우짓이라도 해야 한다며
전 시어머니는 늘 내게 말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여우가 돼야 해.”

나는 그 말이 싫었다.
괜히 아양 떠는 여자가 되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여우가 아닌 곰이 되었다.
단순하고, 답답하고, 묵묵한 곰이었다.




김포공항에서 처음 전 시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분은 내 팔목을 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 팔목으로 무사? 이걸루 네 귤 딸 수가 있겠엉?
우리는 육지 사람 안 좋아해서, 좋은 사람 만나라 잉~”


그때 나는 새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고
한껏 예쁘게 차려입고 갔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첫마디는 내 키와 팔목을 탓하는 말이었다.
작고 마른 몸이 그렇게 큰 반대 이유가 될 줄 몰랐다.


“어머니, 저 이래 봬도 힘 세요. 귤 충분히 딸 수 있어요.”
그렇게 좋아서 한 결혼이었다.
유교 관습에 따라 누나 먼저 결혼식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에서 한 번, 제주도에서 또 한 번.




제주에서의 결혼식은

정말 돼지를 잡아다 가마솥에서 끓이는 잔치였다.

마당에는 처음 보는 어른들이 윷놀이를 하고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무거운 올림머리에 촌스러운 색조 화장을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미소를 잃지 말아야 했다.


그날, 하늘은 이상하게도 맑았다.




살면서 처음 해본 일이 많았다.
묵가루를 쒀 보고,
대야에 수십 명의 그릇을 설거지하고,
꽃무늬 통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으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명절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마당에서 생선을 굽고,
시어머니가 만든 두툼한 산적꼬치를 수백 개나 꿰었다.

송편은 기본이었고,
제주도 떡인 ‘별떡’을 함께 만들었다.


내 친정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공부하고,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그래서 나는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서툴렀고, 엉성했다.
하지만 그땐 그걸 부끄럽게 여겼다.
곰처럼 참고, 곰처럼 버텼다.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점점 겁이 났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딱 내 이야기였다.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차판이 쟁반인지를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땐 몰랐다.


그 모든 게 언젠가 그리움이 될 줄을.




이혼 후, 명절 스트레스는 사라졌다.
차례상도 없고, 제사 준비도 없고,
손이 갈 곳도, 목소리를 낮출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절이 오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 시댁 마당의 웃음소리,
바람에 날리던 고사리 냄새가
문득 그리웠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떠오른다.

마을 입구에서 시댁으로 가는 길,
커다란 창고,
바다가 보이던 옥상.


버릇없는 며느리가 될지언정
그때 한 번쯤 대차게 말대꾸라도 해볼걸.
아양이라도 한 번 떨어볼걸.

그랬다면 지금처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들이 다 내 삶이었다.


답답했던 곰의 세월도,
그 속에 스며 있던 정(情)도,
이제는 다 그리움이 되었다.


곰으로 살았고,
곰으로 떠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바람 속에,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제주도 성산 앞바다의 바다 내음도 함께 흘러온다


“곰보다는 여우가 좋단다—”


그 말이
이렇게 따뜻하게 들릴 줄,
그땐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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