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믿음으로 건너온 전쟁의 강 5

사랑과 믿음으로 건너온 전쟁의 강 5

by 김효숙


“1950년” 아버지가 스무 살이 되던 그해 3월, 시골 작은 교회 마당에서 어머니와 혼례를 치렀다. 먼저 교회 다니는 세 처녀와 맞선을 보았는데, 아버지 의사는 묻지도 않고 혼인 상대의 최종 선택은 할머니가 했다. 할머니는 주저 없이 어머니를 찍었고, 아버지는 별다른 반대 없이 그 뜻을 따랐다.

할머니가 본 것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영리해 보인다.”는 강렬한 첫인상과 파평 윤씨 가문의 규수라는 점은 몰락한 양반가의 체면을 지탱해 줄 마지막 명분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맞선 자리에서 처음 본 아버지의 사나이다운 기품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특히 눈썹이 갈매기 날개처럼 솟구쳐 오르는 선은 잊히지 않는 매력이었다. 그 강인한 눈매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를 본 듯했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의 선택에 물음이 던져진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큰댁에 얹혀 살던 고아였다. 가문이 기댈 만한 배경도, 든든한 친정의 울타리도 없었다. 그런 처녀를 왜 주저 없이 할머니의 며느리로 선택했을까?

단순히 영리해 보여서? 아니면 단지 파평 윤씨라는 성씨 하나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었을까?


혼례가 끝나자마자,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부엌일, 빨래, 집안의 자잘한 일을 일일이 지시하며 새 며느리를 샅샅이 관찰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큰댁에서 자라며 머슴처럼 소몰이와 논밭 일만 해 왔을 뿐, 부엌일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왼손잡이라 칼질은 어색하고 서툴러,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설거지와 뒷정리에서도 능숙하지 못해, 곧바로 할머니 눈에 나게 되었고 못마땅한 며느리로 비쳐 할머니의 선택에 울화가 터졌다.

게다가 할머니는 이미 분열 증세가 있어 누군가를 투사 대상으로 삼아야만 마음을 버틸 수 있는 분이었다. 그 투사의 화살이 고스란히 새 며느리에게 박혔다. 정신증을 앓는 시어머니의 미움은 이유를 따지지 않았고, 쏘아대는 화살에 어머니는 표적이 되어야 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배제되었다. 밥상에는 앉을 수 없었고, 부엌에서 혼자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거나, 때로는 아예 굶어야 했다. 가족 그 누구도 어머니를 상 위로 불러올 용기도, 힘도,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의 존재는 가족의 밥상에서 지워져 있었다.


할머니는 시종일관 큰아들만을 우상처럼 추앙했고, 자신이 잘못 선택한 며느리를 하루빨리 내쫓을 빌미만 찾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날 선 말과 분노의 화살을 날렸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의 돌발적인 분노에 정면으로 저항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몰래, 할머니 눈을 피해 옷 속에 음식을 숨겨 어머니에게 건네주곤 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의 저항이자 애정이었다. 내동댕이쳐진 신세처럼 자라난 어머니는, 그 작은 애틋함이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성장해 한국말이 서툴렀다. 말을 하다 보면 일본어가 섞였고, 그 때문에 일터에서는 ‘족발’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늘 의사 표현에 주눅이 들어 있었던 아버지에게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각시는 달랐다. 일제 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섞어 쓰는 일본 말을 곧잘 알아들었다. 우리 어릴 적에도 두 분은 일본말로 대화를 나누곤 하셨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친구였다. 서로의 말이 통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분은 험난한 삶 속에서도 작은 안도와 서로에게 기대는 힘이 되었다. 둘만의 소통이 있었기에 모멸과 고단한 시집살이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신혼의 달콤함은커녕 시집살이의 고단함에 겨우 적응해가던 어머니와, 가족의 짐을 홀로 지고 있던 아버지의 삶은 또다시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해 6월 25일, 남북 전쟁이 발발했다.

총성이 한반도를 가르고,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전쟁의 난민이 되었다. 청년들은 가족의 품을 뒤로 한 채 전선으로 떠나야 했고, 남겨진 이들은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 파도는 우리 집안에도 예외 없이 몰아닥쳤다.


1950년 7월, 아버지는 마침내 징집 명령을 받고 전쟁터로 떠났다. 스무 살의 청년, 결혼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은 가장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할머니는 땅을 치며 울부짖었고, 새댁이 된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갓 시집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이 죽음의 땅으로 내몰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 어머니는 두 다리가 풀리듯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짐짓 굳은 얼굴, 이를 앙다물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책임감이 뒤엉켜 있었다.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깊은 가을이 저물어 갈 즈음, 어머니의 운명은 전선과 함께 가혹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신랑은 징병되어 전장으로 끌려가 버렸고, 어머니는 마치 거대한 괴목으로 둘러싸인 광야에 홀로 남겨진 듯 고립되었다. 곁에는 실성한 시동생, 분열증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시어머니, 언제나 방관자로만 서 있던 시아버지가 있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는 숨을 곳조차 없이 갇혀 있었다. 낮에는 노예처럼 일했고, 밤이면 혹시나 실성한 시동생이 덮칠까 두려워 문고리에 빗장을 걸어 놓고도 떨며 지새웠다. 그 시동생은 열일곱 살, 어머니보다 겨우 한 살 아래였다.

어느 날 밭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삼촌이 신혼 방에 벌러덩 누워 있는 곤히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어머니는 기겁하며 놀라 달아났고, 그 경악은 몸을 떨게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잠을 깨웠다”며 며느리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흔들었다. 설거지와 뒷정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으로 가슴팍을 내리치기도 했다. 신랑 없는 시집살이가 어머니에게 단순한 삶이 아니라, 무서운 형벌 같았다.


어머니는 살길을 찾지 못해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부모 없는 친정으로는 이 모양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죽음을 결심했다. 캄캄한 밤, 살며시 집을 나와 낙동강변으로 달려갔다. 차디찬 강물 속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흔들며 하늘을 쳐다봤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달빛이 강물 위에 부서져 흐르는 순간, 외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순귀는 하나님께 맡긴다…”

어머니는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던 외할머니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보살펴 주실 텐데 내가 왜 죽으려 하는가—그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외할머니는 만주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하며 집을 비울 때마다 어머니에게 꼭 외우게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은 강물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절망 속으로 스며들어 와 어머니를 다시 육지로 걸어 나오게 한 생명의 끈이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물살을 뚫고 어머니는 다시 육지로 걸어 나왔다. 어머니 배 안에 생명이 꿈틀거렸다. 첫 태동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발걸음을 밀어 달리고 또 달려, 겨우 집에 닿았다.


삽짝문을 열고 방문을 들어서자, 어머니는 마치 목욕시킨 강아지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물기를 털어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묻고는, 참아왔던 울음을 한없이 쏟아냈다. 그 울음은 강물보다 더 깊었고, 달빛보다 더 쓸쓸했다.


방관자로만 서 있던 할아버지는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심히만 보였던 시아버지 마음 저편의 흔들림을 보았다. 할아버지의 차갑던 눈빛 속에서, 처음으로 안쓰러움이 비쳤다. 멸시가 아닌, 구슬프고 쓸쓸한 동정의 눈빛이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작은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대단한 도움은 아니었다. 늘 게으르다는 말만 들으며 살아온 분이었지만, 그 작은 연민의 마음은 어머니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버틸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집에서, 할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가 어머니를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버팀목이었다.


할머니의 분열된 시선은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마저 끝내 왜곡된 말과 시선으로 어머니를 괴롭혔다. 그것이야말로 숨 막히는 수치의 굴레였다.

삶을 선택한 어머니는, 사는 방식이 달라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쥐면, 어머니도 할머니의 머리채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싸움판에서 오히려 뒷걸음질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저 여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둔갑한 바로 그 구미호라며”고 떠벌렸다. 그 말은 단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손자녀에게까지 주입 시키며 세뇌하는 할머니 나름의 전술이었다. 어머니는 살아내기 위한 발버둥이 할머니의 눈에는 이미 낯선 괴물로 비춰지고 있었다.


산달이 가까이 오자 어머니는 임신중독으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숨조차 가빠오는데도, 할머니는 마치 죽기를 바라는 듯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어머니는 큰집 친정으로 몸을 옮겼다.


외가 식구들은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한목소리를 냈다. 급히 약재상에 달려가 물으니, 무씨를 달여 먹으면 태아에게도 무해하고 붓기도 빠진다는 말을 들었다. 외가 식구들은 무씨를 사 와 정성껏 달여 주었다.

어머니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듯 그 약을 받아 마셨다. 기적처럼 붓기가 가라 앉았다. 며칠을 푹 자고 쉬었더니 몸과 마음이 한결 풀려났다.


그렇게 기운을 조금 되찾은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온갖 고통과 두려움 끝에 드디어 초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것이 우리 집의 맏아들, 큰오빠였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건져 올려진 어머니가, 이제는 새 생명을 품에 안은 것이다. 큰오빠의 울음소리는 절망으로 가득했던 집안에 처음으로 울려 퍼진 희망의 소리였다.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제주 훈련소에서의 아버지의 하루는 새벽 기상 나팔소리로 시작되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훈련병들은 줄을 맞추어 세워졌다. 바람은 칼처럼 불어왔고, 천막 막사는 밤새 습기로 젖어 눅눅했지만, 그런 불편을 입 밖에 낼 겨를도 없었다.


아침 식사라 해봐야 옥수수죽이나 보리밥 한 덩이에 짠 된장국 정도였다. 때로는 배급조차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굶주린 채 훈련장으로 향해야 했다.

훈련은 거칠고 단순했다. 제식 훈련으로 하루 종일 구보하고, 총검술을 익히며, 모래바람 속에서 포복 훈련을 반복했다. 탄약이 부족해 나무 막대기를 총 대신 잡아야 하는 날도 많았다. 훈련병들은 땀과 흙, 석탄재에 범벅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묵묵히 버텼다.


낮이 되면 뙤약볕에 숨이 턱턱 막혔고, 바닷바람이 훈련장을 덮쳤다. 해가 저물면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 부족 때문에 씻을 물은커녕 목을 축일 물조차 귀했다. 밤마다 눅눅한 천막 안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을 청했지만, 바람이 텐트를 들쑤실 때면 깊은 잠은 사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끝없는 훈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알았다. 이곳에서의 고됨은 곧 전쟁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짧은 준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주 바람은 훈련병의 땀을 식혔지만, 곧 화염에 마주할 낙동강 전선의 출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밀양은 전쟁의 한복판은 아니었지만, 늘 전선의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공산군의 발길이 직접 닿지는 않았으나, 대구와 마산을 잇는 길목이었던 밀양은 언제든 위태로운 경계선 같았다. 포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피난민들이 몰려들며 마을은 술렁였다. 공산군은 오지 않았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이미 밀양을 뒤덮고 있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일본이 벌인 2차 세계대전을 ‘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 일본이 아시아 해방을 내세우며 붙인 이름이었지만, 실상은 침략과 약탈의 전쟁이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본토에서 그 전쟁을 경험했다.


어머니가 만주에서 살던 시절, 마을은 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가끔씩 ‘오랑캐’라 불리던 무장 집단이 들이닥치면, 집은 부서지고 귀금속과 양식은 모조리 약탈당했다. 저항할 수조차 없는 힘 없는 이들은 그저 떨며 숨어야 했고, 불안은 삶의 공기가 되어 버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그런 폭력의 밤을 여러 차례 견뎌내야 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의 광풍 속에서 이미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었기에, 또다시 다가올 전쟁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할 수 있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모두 목숨을 잃는다”는 불안감에 어머니는 핏덩이를 업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가족 모두는 미리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에 도착했고, 영도의 피난민 촌에 조그만 오두막 집터를 마련했다. 그때의 오두막은 얇은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천막처럼 허술한 집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덜컥거렸고, 비가 내리면 빗물이 스며들어 방 한쪽이 금세 젖어버렸다. 아주 초라한 보금자리였지만, 그곳은 살아남기 위해 붙잡은 마지막 안식처였다.


자리를 잡자, 어머니는 백일도 채 안 된 큰오빠를 등에 업고 제주도 훈련소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길을 나섰다. 가진 것이라고는 겨우 배삯에 보탤 만큼의 허름한 보퉁이뿐이었다. 목포까지 가는 기차표를 살 돈조차 없었지만, 어머니는 “무조건 타고 보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젖먹이를 등에 업은 젊은 아내의 발걸음은 떨렸지만, 전쟁터로 나간 남편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 하나가 그 길을 떠받치고 있었다.


기차는 증기기관의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달리고 있었다. 곧 차표 검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끝내 무임승차임이 발각되고 말았다. 젖먹이를 등에 업은 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승무원은 한참을 노려보더니 강제로 내치지 않고, 기관차 연료칸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목포까지의 길은 지옥과도 같았다. 석탄이 타오르는 열기와 그을음, 기차 굉음이 끊임없이 덮쳐왔다. 어머니는 아기의 귀를 두 손으로 막고, 기저기로 얼굴을 덮어가며 온몸으로 보호했다. 그렇게 까만 재와 눈물 속을 견디며, 마침내 목포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어머니는 부산항-제주 노선을 선택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면서까지 목포항을 택했을까? 아마 부산 대신 목포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부산행 운송이 불확실한 가운데, 목포발 제주행 배가 상대적으로 잦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의 눈을 피해 먼 길을 택한 어머니는, 목포항의 어수선한 밤바다에 아기를 안고 선 채 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배엔 실려 떠났다. 그 배가 ‘도라지호’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기록엔 확증이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 배가 자신을 제주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었고, 가슴은 알 수 없는 떨림으로 두근거렸다.

그렇게 목포에서 제주행 배에 오른 어머니의 걸음은, 역사의 굴곡 속에서 가장 치열한 믿음이었다.


사선을 향해 나설 준비를 하던 훈련병 아버지 앞에, 먼 길을 달려와 갓 태어난 아들을 안은 어머니가 나타났다. 기차 연통 속에서 재로 그을린 까만 얼굴, 오랜 여정에 지쳐 초라하고 못내 서러운 몰골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눈부신 아내였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아가야 하는 운명 앞에서, 가족의 체온이 다시 품에 안겨 왔다.

서로의 손을 맞잡는 그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서로의 심장이 부딪히는 듯한, 뜨겁고도 간절한 해후였다. 죽음이 기다리는 내일에도 불구하고, 그날만큼은 살아 있음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적 같은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강물에서 건져 올린 생명의 말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편 1절)는 말씀을 죽는 날까지 붙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음의 전장을 함께했던 군번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기억은 살아 있는 진실이지만, 기록은 늘 뒤따라가곤 한다. 당시는 전쟁과 혼란으로 모든 것이 어수선하여 혼인과 출생 신고가 제때 되지 않아, 호적의 날짜는 언제나 실제보다 늦게 새겨졌다. 그 오차 또한 혼란스러운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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