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선잠을 잤더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버스가 퀸스타운에 다가갈수록 오전에 보았던 초원지대가 다시 나온다.
드넓은 초지 위에서는 여전히 양들이 풀을 뜯는 한가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섬의 가이드도 북섬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상점만 찾아다닌다.
뉴질랜드에서 한국인끼리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는 제한적인 삶의 구조가 엿보인다. 중국인은 중국 교포에게, 일본인은 일본 교포에게 지구촌 어디를 가나 끼리끼리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 지구촌의 삶의 모습인가 보다.
초원지대에는 나무를 심어 경계를 숲으로 조성한 울타리가 시야로 들어오고, 그 경계들 사이에서 사슴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바라보인다.
오후 18:13분. 버스가 한참을 달리더니 남섬의 모스번 마을에 잠시 정차했다. 가이드는 모스번 마을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슈퍼로 일행을 데려간다.
뉴질랜드까지 와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에 들어가자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어 좋다. 일행을 따라 슈퍼를 한 바퀴 둘러보며 구경하는데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선물로 살만한 것이 없다.
일행과 슈퍼를 나와 도로 건너편으로 건너가 소나무 둥치와 솔잎을 만져보았다. 소나무는 우듬지를 싹둑 잘린 채 둥치만 잔뜩 부풀린 채 자라고, 도로에는 차량이 간간이 지나가는데 먼지조차 일지 않는다.
소나무 솔잎을 손으로 쓱 훑어봐도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는다. 일행과 슈퍼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가자 어제 묵었던 퀸스타운 호텔을 향해 운전대를 돌린다.
버스가 아침에 지나왔던 퀸스타운의 와카티푸 호숫가를 부지런히 달려간다. 밀포드사운드의 냉랭한 공기가 이곳까지 밀려와서 산 정상의 만년설이 녹지를 않는다고 한다.
퀸스타운에서 밀포드사운드까지 가는데 버스로 세 시간쯤 걸린다. 밀포드사운드로 갈 때는 산이 점점 높아지다가 퀸스타운으로 되돌아올 때는 정반대가 된다. 가이드에게 이곳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 보니 버스가 어느새 퀸스타운 시내로 들어선다.
가이드가 뉴질랜드의 사회보장, 정치, 경제, 교육 등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니 뉴질랜드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소득이 있는 곳에 합당한 세금을 부과하고, 노약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철저한 배려다. 그리고 법을 위반하면 예외 없이 처벌한다는 원칙이다.
국민이 법을 준수하는 의식 수준의 차이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한다. 국민을 나라 앞에 세우면 선진국이고 나라 뒤에 세우면 후진국이다.
버스를 운전하는 캡틴은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 운전하고 추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전 캡틴에게 일행이 단체로 이동해서 저녁을 먹기 위해 운전을 부탁했더니 거절했다. 소득이 추가로 발생하면 그에 대한 세금을 내야 해서 굳이 정해진 시간 외에는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시간 외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소득이 생겨도 되도록 누락시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린다. 뉴질랜드는 제도를 준수하려는 준법정신이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라의 사회보장 제도와 시스템을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 가이드에게 듣는 말이 아닌 직접 현장을 체험하고 겪으면서 내가 사는 나라보다 어떤 점이 좋은지 나쁜지를 몸으로 체험해 보고 싶다.
하늘의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이울면서 햇빛의 강도가 세어졌다. 공기가 맑아 그런지 햇빛을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빛의 강도가 세다. 카뮈의 ‘이방인’ 뫼르소가 이곳을 여행했다면 바로 살인했을지도 모를 만큼 오후의 태양 빛이 강렬하다.
오늘은 이곳의 산자락 모습이 제대로 바라보인다. 대기에 찬 공기가 산등선을 타고 층을 이루고 있어 풀이 자라지 않는 것 같다. 봄은 봄이지만 한국처럼 서정적인 분위기가 배어나지를 않는다.
사계절을 하루에 품고 있는 이곳의 날씨 때문이다. 태양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나는 퀸스타운의 시내를 버스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유유히 지나가는 중이다.
오늘은 퀸스타운에서 밀포드사운드로 가서 관람하고 숙소로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여행은 단조로움과 몸의 피로감이다.
어제 머물렀던 호텔 앞의 산자락을 다시 만나자 반가움이 앞선다. 여행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동안 몸에 배었던 한국에서의 익숙한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낯선 생활방식에 하나하나 적응해 간다.
어제저녁 과식을 한 것 같아 걱정했는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 여행하면서 과식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는데 어제는 분위기와 야경에 취해 좀 과식을 한 것 같다.
오늘은 배속에서 아무 일 없이 밀포드사운드를 다녀와서 다행이다. 여행 중에 느끼는 감정은 무언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이다.
낯선 이국의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쓰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힘들다.
여행작가는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여행기를 쓸까. 일행과 여행을 함께 다녀도 나무나 식물을 만나도 태양과 별과 달을 바라보아도 보는 관점과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를 것이다.
어쭙잖게 버스에 앉아 이곳에서 마주하는 느낌과 감상을 비망록에 적는데 엉망이다. 초원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메말라만 가고,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마음의 깊이가 부족한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남은 여정의 시간에도 무언가를 끄적거려 보려고 한다. 누군가 내게 부여한 의무는 아니지만 한 번 해볼 만한 일이 아니던가.
이국에서 느끼는 감정이 고갈되어 가자 머릿속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오늘은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