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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Dec 28. 2022

Adios nonino

탱고를 즐겨 듣지는 않지만, 탱고를 좋아한다. 탱고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음악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유튜브에서 찾아 들을 정도지 공연을 본 적은 없다. 그저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라든가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의 탱고를 인상적으로 기억할 뿐이다.


공연 예매했는데 같이 볼 거지?     


내가 결정 장애인 것을 너무 오래 봐온 친구는 그렇게 나의 첫 탱고 공연 약속을 잡아 통보했다. 남양주에서 인천까지 오겠다며 밥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 건지, 커피는 어디서 마실 건지 미리 찾아놓은 친구 때문에 웃음이 났다. 오래 만난 친구란 참 좋다.


클래식에 한창 빠져있는 친구는 오늘 공연을 하는 연주자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양인모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얼마나 유명한지, 문태국이라는 첼리스트가 상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그러다 우리의 대화는 19살의 임윤찬에게 향했고, 조성진이 94년생이라는 것에 잠시 멈춰서 BTS의 리더 RM과 동갑이라며 놀라워했다.      


이어 아티스트의 조건으로 흐르다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에세이 이야기 끝에 요즘 빠져있는 질문을 친구에게 던졌다.


“사랑이 뭘까?”     


요즘 나는 사람에 대한 실망을 많이 느끼고 있다. 진짜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사람은 그저 이기적이고, 각자 생존에 충실한 게 아닐까?


“사랑은 운명인 거 같아.”

안타깝게도 그런 허무맹랑한 말로는 내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날은 더 추워졌다. 칼날 같은 바람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우리는 핫팩을 하나씩 들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지고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와 줄리앙 라브로의 반도네온 연주가 시작되었다.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 오로지 무대에 선 연주자들만 보였다. 그것은 유튜브로 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숨소리까지 느껴진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연주자가 얼마나 음악에 빠져있는지 무엇을 전달하고 싶어 하는지 전해졌다. 시작의 긴장과 관객을 의식하는 것까지 느껴졌다.


세 번째쯤 그 곡이 연주되었다. ‘아디오스 노니노’     


이 탱고곡은 연주를 듣는 내내 이별을 떠올리게 했다. 가사 없이도 슬픔과 그리움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피아졸라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연주한 곡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주를 듣는 동안 나는 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해변가. 물 위를 헤엄치다가 깊이 잠수했을 때의 외로움과 혼자 가라앉는 동안의 그 두려움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다만 함께 잠수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잡고 본 적 없는 것들을 볼 것 같다. 그다음 가져본 적 없는 감정들이 밀려올 것이다.       

아디오스 노니노는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르쳐준 사람과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잠수하는 것이 두려운 나에게, 괜찮다고 바닷속을 들여다보라고 해준 사람과 이제 헤어지고, 오롯이 혼자 잠수해야 한다 말하고 있다. 혼자서도 바다를 헤엄칠 수 있다고 말이다.


탱고는 사랑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디오스 노니노는 분명 이별의 음악이었다. 이 보다 이별에 대한 감정을 불러오는 곡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생각했다.


이별이 사랑이구나.

얼마나 아픈 이별이냐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가르쳐 주는 거야.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이별한 후에야 나로 완성된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별은 슬프지 않다. 지금 많이 아프고, 많이 분노하고, 슬프다면 나는 많이 사랑한 것이다. 그다음 바다를 혼자 헤엄칠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이 되어간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찬 공기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우리는 핫팩을 꼭 쥐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공연에 대해 떠들며 늦은 시간 어둠 속을 걸었다. 나야 집이 가깝지만 친구는 남양주까지 돌아가야 했다. 새삼 여기까지 공연을 보러 온 친구가 멋있어 보였다.      


대학 때 만나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 이 친구라면 운명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단어를 사용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친구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어 주었다.


Adios Am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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