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이원우는 안개 속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거야?’
한쪽은 민박집 다른 한쪽이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이 그쪽인지 저쪽이 그쪽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똑같은 길이었고 똑같은 안개였다. 빛이 오는 방향도 바람이 부는 방향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방법은 내딛는 발아래만 보며,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해변으로 가는 길이든 민박집으로 가는 길이든, 논 사이의 좁은 길에 낭떠러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이원우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언제 끝나는 거야?”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방울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원우는 황은채라고 했던 민박집주인 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시작할 때 짧게 세 번, 끝날 때 길게 한 번이에요.“
안개가 들어올 때 세 번 사이렌이 울리고, 안개가 사라지고 나면 한 번 울린다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끝날 거라는 믿음으로 원우는 그저 천천히 하얀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멈췄다. 조금 전에 만난 사람이 정태인지 유리인지, 안갯속에서 착각한 것인지 지금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이원우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밥상에만 앉으면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큰 적이 있을 때, 작은 적은 친구로 만들어야 해. 적을 여러 명 만들면 반드시 그 전쟁에선 지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 적은 누군데요? “
“규칙을 바꾸려는 놈들이지.”
“규칙을 지키지 않는 건 아버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그 규칙을 바꾸려는 놈들 말이야.
원우는 아버지의 말이 귀에서 이명처럼 흐르자,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우물을 들여다볼 때의 그 메스꺼움과 심장을 죄어오는 구토증이 그를 괴롭혔다. 우물 속에서 본 좁고 어두운 가늠할 수 없는 깊이. 그래서 더 비릿했던 물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어둠을 들여다보던 자기 자신과 안정태, 백유리의 얼굴이 잔상처럼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큰 적 앞에서 작은 적은 친구여야 했다. 규칙을 바꾸려는 친구를 응징한 것뿐이어야 했다.
“안정태? … 백유리?”
이원우는 안갯속을 걸으며 다시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차라리 무엇이든 나타나기만을 바랐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길과 세상을 지워버린 안개 속에서 분명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규칙이 점점 두려워졌다.
아들! 너는 규칙 위의 규칙을 만드는 계급이 될래?
아니면 규칙을 맹종하는 계급이 될래?
원우는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손바닥 위로 흐르는 하얀 안개가 보였다.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보며 그 손이 자기 손인지 확인했다.
웨에에에엥웨에에에에엥.
거인의 비명 같은 사이렌이 길게 울리자 원우 앞의 안개가 조금씩 물러났다. 안개가 멀어져서 사이렌이 울리는 것인지, 사이렌 소리에 안개가 도망가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는 순서였다. 어쨌든 긴 사이렌이 멈추고, 안개는 원우에게서 꽤 멀리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원우의 눈으로 들어온 것은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과 노을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였다. 그는 해변 쪽으로 걷다가 자갈을 밟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먼 하늘은 주황색이었고, 위로 고개를 올릴수록 하늘은 분홍빛이었다. 분홍색 구름 아래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백유리가 서있었다. 백유리는 핸드폰으로 분홍빛 하늘과 바다를 연신 찍어댔다.
밀려오는 파도와 달리 밀려가는 안개는 바다를 마치 용암에 끓어오른 온천처럼 보이게 했다. 야외 온천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처럼 안개는 분홍빛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풍경 속 백유리는, 백유리인데 백유리 같지가 않았다.
“백유리?”
유리가 원우를 향해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백유리가 해변 자갈을 밟으며 걸어왔다. 원우는 조금 전 안개 속에서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얼굴을 떠올렸다. 정태의 얼굴을 하고 자신이 백유리라던 그 존재를 떠올리자, 너무나 자연스레 의문이 밀려왔다.
“왜 혼자야? 정태는?”
정태의 부재를 의심하고 있는 백유리, 아니 백유리의 얼굴을 한 이 사람은 진짜 백유리일까? 원우는 백유리의 얼굴 위로 바짝 다가온 어둠을 보며 그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밥상 앞에 앉으면 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규칙을 만드는 놈들은 말이야. 어떤 각오로 만드는 줄 알아? 살려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그런 다음 꼭 덧붙였다.
아들! 가장 좋은 방법이 선을 긋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