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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신 疫神 찾기 (1)

by 김사과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내가 곧 죽을 모양이요.”


반촌 주막의 주모가 아침부터 마루 끝에 앉아 한숨을 토하는 사이, 마주 앉은 호산월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수수 반죽을 뜯어 새알심을 빚었다.


“한숨만 쉬지 말고, 좀 자세히 말해봐요.“


주모 대신, 팥죽에 들어갈 새알심을 빚으며 호산월이 물었다. 그러자 주모가 그 새벽의 일을 다시 떠올리며 손을 들어 싸리문 앞을 가리켰다.


“새벽에 눈이 떠져 나왔는데, 저기에 서있었소. 어찌나 놀랐는지 마루에 오줌을 다 지렸네.“

“처녀 귀신이요? 몽달귀신이요?”


“그걸 알 수가 있나? 종잇장처럼 얇고 바스락거리는 치마 아래 부지깽이처럼 말라비틀어진 다리가 있고, 신도 신지 않은 발은 살이 하나도 없는 뼈다귀였소.“

“뭐라 말을 하더이까?”


“답답하네. 팔도 없고 손도 없고 얼굴도 없이, 허리가 동강 나 그 아래만 있는 귀신인데 무슨 말을 하겠소. 아무래도 오늘밤 내가 죽을 모양이오.”


오늘은 동지였다. 낮인데도 구름이 잔뜩 낀 반촌은 빛이 들지 않고, 어둑어둑했다. 안 그래도 음기가 가장 세고 어둠이 가장 긴 날이니, 주모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앓는 소리 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팥은 담가놨소? 잘 불려야 골고루 삶아질 텐데.”


“기방에서는 팥죽도 안 쑨답니까? 송화루 정도면 고운 찹쌀가루로 만든 새알심을 넣을 텐데, 뭐 얻을 게 있다고 아침부터 여기 와서, 팥죽을 쒀라 … 새알심은 수수로 해라 … 시어머니가 따로 없지.”


주모의 타박에도 호산월은 웃기만 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수수 새알심이 잔뜩 쌓인 바구니를 본 주모가 슬쩍 호산월을 보았다.

송화루 잔치에 일 도와주러 갔다가 인사 한 번 한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눌러앉아서 일을 도와줄 인연이 아니니, 믿음도 안 가고 괜히 속만 뒤집어 놓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바구니에 쌓인 새알심이 동글돌글하니 곱고 예뻤다.


“동지에 팥죽을 먹지 않으면 잡신에게 된통 당한다는 말 알지요? 이번엔 아주 많이 쑤어야 합니다. 가장 큰 가마솥을 걸고, 팥부터 삶아요. 오늘은 손님이 많을 겁니다. 반촌 사람들만 아니라 성균관 유생도 먹으러 오지 않겠소?”


호산월의 말에 주모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엉덩이를 돌려 호산월과 마주앉았다.


“나 죽게 생겼는데, 그깟 팥죽이 대순가?”


툴툴대면서도 수수반죽을 뜯어 손바닥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곧 있을 정시 때문에 잡귀 잡신을 쫓는다는 축귀 의식도 있었다. 주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투리를 고쳐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팥죽을 넉넉히 쑤어 여기저기 뿌려두어야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전날 불려놓은 붉은팥을 가져다가 가마솥에 쏟고, 마당에 만든 아궁이에 불붙은 장작을 가져다 넣었다.


“차일은 없소? 눈이 올 듯한데. 아는 일꾼이 있으면 마당에 차일을 쳐야 할 듯싶소. 그릇도 닦아두고, 수저도 여러 벌 꺼내 놔요. 오늘은 손님이 많을 텐데 허둥대다가 실수라도 하면 낭패 아니겠소?”


호산월은 반죽을 조금씩 뜯어 손바닥으로 굴렸다. 호랑이 피에 물들어 붉게 변했다는 거친 수숫가루 반죽도 동글동글해지자 박새알처럼 보였다. 구름은 점점 더 몰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반촌 하늘로 팥을 삶는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붉은 팥죽이 끓기 시작할 즈음 목화꽃 같은 눈이 포슬포슬하게 흩날렸다. 주막은 마당 위로 차일을 쳐서 눈이 들이치지 않았고, 덕분에 팥죽을 먹으려고 몰려든 손님들은 편안하게 한 그릇씩 먹고 떠났다. 대부분 반촌에 사는 성균관의 노비들이었는데, 달고 구수한 냄새 때문인지 근처의 좌포청과 훈련도감의 군관들이 들러 수수 새알심이 들어간 팥죽을 먹고 갔다.


“아무리 은퇴한 기생이라지만, 할 일이 그렇게 없소? 언제까지 들러붙어있을 겁니까? 이제 올 손님도 다 왔고, 팥죽도 거의 동났으니 더 어둡기 전에 가 보세요.”

날이 저물어 문 앞의 등에 불을 켜고 온 주모가 평상에 앉은 호산월에게 하루치 품삯으로 말린 명태 세 마리를 내놓았다. 이쯤하고 그만 가라는 신호인데도 호산월은 누굴 기다리는지 주막 밖의 거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주모가 남은 팥죽을 담기 위해 함지박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는데, 주막의 마당으로 키 큰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팥죽 남은 게 있으면 한 그릇 내주시오.”


사내는 키만 큰 게 아니라 어깨도 넓고 팔도 두꺼웠다. 두툼한 팔 만큼이나 두툼한 손이 힘깨나 쓸 것같이 보였다.


“이 시간까지 팥죽도 못 먹고 뭐 했어?”

“사흘 후면 정시잖아요. 임금님도 행차하신다고 성균관으로 소랑 돼지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어요. 하루 종일 그거 잡느라 밥도 못 먹었네.“


그의 짚신과 두툼하게 껴입은 바지 저고리 군데군데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백정은 자기 팔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인상을 썼다.


“피냄새가 아직도 진동해요. 울음소리도 떠나지 않고, 밤에 잠이라도 자려면 팥죽은 먹어야지.“

“고생했네. 팥죽이랑 술은 내가 그냥 줄게.“




주모가 부엌으로 들어가 상을 차리는 동안 호산월이 사내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저는 호산월이라고 합니다. 재인(宰人)께서는 성함이 어찌됩니까?“


사내가 어리둥절해서는 옆으로 슬쩍 옮기며 호산월을 피했다. 그 사이로 주모가 술상을 갖다 놓고, 커다란 나무 그릇에 뜨끈한 팥죽을 담고 수수 새알심을 넉넉히 올려서 가져왔다.


“저치는 반촌의 현방 주인이요. 나도 저 집에서 고기를 받아 씁니다. 그런데 진짜 안 갈 겁니까?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


호산월은 주모의 타박에도 아무 대답하지 않고 반촌 백정의 술그릇에 뽀얀 탁배기를 따라주었다. 당황한 백정이 눈을 끔벅거리며 두 손으로 술그릇을 잡았다. 낮 동안 내린 눈은 주막의 장독대와 지붕, 차일 위에도 제법 쌓여 눈을 돌리면 온통 소복했다.

달빛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주막 앞에 켜둔 등불은 싸리문 앞을 겨우 비추었다. 동지의 어둠이 깔린 그 길로 눈이 부실 것 같은 제등 불빛이 일렁이며 들어왔다.


수염이 없는 두 사내가 제등을 든 체 움직였고, 그 뒤에 비단 도포를 입은 사내가 걸었다. 그 뒤로는 젊은 사내 둘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 둘은 긴 검을 들고 있었다. 주막 안의 세 사람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저들이 어째서 반촌에 있나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제등 불빛이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




“주모! 여기 팥죽 한 그릇 가져오시오.”

“추운데 방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주모는 낯선 사내들의 입은 옷을 훑어보고는 한껏 상냥해져서는 콧소리를 내며 방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하얀색 비단 도포를 입은 사내가 평상의 백정 옆에 앉자, 아무도 방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주모는 얼른 술상을 내왔다. 가지고 있는 그릇과 술병이 뻔하니, 백정의 술상이나 비단 도포를 입은 사내 앞에 놓은 술상이나 모두 똑같았다.


“소인은 퇴기 호산월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형님을 만나러 이곳에 와 있는 참입니다. 소인이 술 한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호산월은 술병을 들어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사내가 든 술그릇에 탁한 막걸리를 따랐다.


“나는 정시를 보기 위해 올라온 생원 이가네. 동지에 팥죽 한 그릇은 먹어야 한다길래 잠시 들렸지.“

이생원이라는 남자가 술그릇에 손을 대자, 제등을 든 남자가 놀라 다가왔다. 하지만 이생원이 눈을 치켜뜨자,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주모는 나무 그릇에 팥죽을 담고, 수수 새알심을 올리다가 힐끗 비단옷 입은 남자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방귀 좀 뀌는 양반인 것 같은데, 찹쌀도 아닌 수수 새알심을 먹겠어? 비단만큼 보드라운 저 입이 거칠고 툭툭 끊기는 수수 새알심을 좋아할 리가 없지.‘


주모는 동글동글한 수수 새알심 세 개만 올린 팥죽 그릇을 이생원의 소반에 올렸다. 이생원은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고, 숟가락을 들어 팥죽을 떠 후후 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백정의 팥죽 그릇과 자기 팥죽 그릇을 이리저리 살피고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산에서 글공부만 해, 내 아는 것이 별로 없네. 요즘 사는 건 좀 어떤가?”

“도성 안에 호랑이 천지라, 밤사이 안녕이라고들 합니다.“


조용히 팥죽을 먹던 백정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평상 옆에 서서 제등을 들고 있는 수염 없는 두 남자가 인상을 팍 썼다.


“모르는 소리 말어. 그게 어디 호랑이 때문이야? 전란이 끝난 지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매년 역병이 창궐하니 그런 거지. 왜놈한테 죽은 사람보다 계사년, 갑오년 대기근 때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잖아. 겨우겨우 살아남았는데, 계축년 역병으로 죄다 황천길 갔지. 사람 목숨이 돼지 목숨만도 못해.”


주모의 입에서 계축년이라는 말이 나오자, 제등을 든 수염 없는 두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이생원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술그릇에 막걸리를 따랐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까만 하늘 위에 달이 떴다. 허리가 동강 난 상현달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호산월은 차일 너머로 보이는 반달에서 눈을 떼고, 주막 안의 사람들을 확인했다.


‘이 중에 누가 역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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