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화 / 비단이나 모시, 종이로 만든 가짜 꽃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곡소리가 공방 안까지 들렸다. 이른 새벽이라 아직 빛이 들지도 않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꿇어앉은 노비들이 서럽게도 울어댔다. 그 소리가 겨울바람과 함께 공방으로 들어와 촛불을 일렁거리게 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로가 하나 있었지만, 공방 안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조금도 막아내지 못했고, 작은 의자에 앉은 호산월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흘렀다.
“모른 척하지. 뭐 얻을 게 있다고 자꾸 끼어들어서 수명을 단축해?”
공방주인의 핀잔에 호산월이 피식 웃었다. 검은색 치마와 진녹색의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색 남바위를 쓴 호산월은 공방 주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붉게 물들인 비단으로 월계화를 만드는 채화장은 짙은 눈썹만큼이나 짙은 턱수염의 남자였다. 50년 넘게 사는 동안 늘어난 주름만큼 눈빛의 그늘도 늘어, 속내를 쉬이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갓을 쓰지 않은 상투에 망건만 한 채로 월계화의 꽃잎을 하나하나 붙여갔다.
“제가 열일곱 때였지요? 기로연에서 아박무를 추는 제 관에 채화장께서 만든 꽃을 꽂았어요. 생화보다 아름다운 채화를 보고 넋이 나갈 정도였답니다.”
“노인네들의 눈에는 너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호산월은 피식 웃으며 남바위를 벗어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채화장께서 만든 준화에 진짜 나비가 날아와서, 임금님이 크게 기뻐하셨다는 말이 도성에 파다합니다.”
호산월의 말에 기분 좋은 것을 감추지 않고, 채화장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월계화를 만드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호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 안을 구경하며 걸었다.
“아드님께서 글공부가 아닌 장사를 선택하였는데,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내 아버지는 의관이었어. 어의가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꽃을 만들겠다고 하니 나가 죽으라고 하셨지. 서운하긴. 양자로 들어와 준 것도 고맙고 백씨 성을 이어준 것도 고맙기만 한데.“
호산월은 벽에 걸린 두루마리 족자 속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끝에 ‘죽도’라는 낙관이 찍혀있었다. 싱그럽고 반듯한 대나무 그림을 보며 호산월은 두 손을 모아 잠시 기도를 하였다. 공방 주인인 백씨는 월계화 만들던 손을 멈추고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죽도에는 가 보셨습니까?”
“딱 한 번…... 깊은 산속이라 참 어렵게 가 보았지. 그때는 모두가 동등하게 어울리는 세상이 올 것만 같았는데… 노비도 양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세상.“
“참 많이도 죽었어요.“
호산월의 말은 채화장의 손이 떨리도록 만들었다. 진연에서 왕과 왕비의 머리 장식을 만들어 바칠 때도, 연꽃이 8개가 들어가는 수파련을 만들어 종묘에 바칠 때도 떨지 않았던 그의 손이, 대나무 그림 때문에 몹시도 떨려왔다.
“그때 죽은 이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지요?”
“기생과 헤어져 흘린 눈물을, 역모를 두둔하는 눈물이라며 때려죽였지. 많이 죽었어. 짐승 사냥하듯이 잡아 죽였어. 맨 뒤에 숨어서, 이놈도 죽이고 저놈도 죽이라고 한 분께 …… 나는 꽃을 바쳤지.”
달처럼 생긴 크고 하얀 항아리에 꽂아놓은 홍매화 위로 먼지가 잔뜩 앉았다. 밀랍에 담가 단단해진 모시 꽃잎은 영원히 시들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흘러 쌓인 먼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염료로 물들인 색은 바래지 않을지라도 덧입혀진 먼지로 인해 본래의 아름다움은 잃어, 곧 버려질 것이 뻔했다.
“꽃을 바쳤어. 생신연에도 기로연에도 쉰하나 먹은 늙은 왕이 열아홉 신부를 데려오는 동뢰연 때도 내가 이 손으로 가짜 꽃을 만들었어.”
채화장 백씨는 들고 있던 월계꽃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꽃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꽃의 너머에 있는 그리운 것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호산월은 다시 걸어와 탁자 앞에 서서 호통쳤다.
“우리를 죽인 왕에게 너는 꽃을 바치며 잘 살았구나?“
채화장의 시선이 돌아오자, 호산월이 웃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 말이 두려워서 이 방을 못 나가시는 겁니까?”
그는 대답 대신 가짜 꽃을 만들었다. 세 갈래로 뻗은 꽃가지에 녹색의 이파리와 붉은 월계화가 완성되자 참 아름다웠다. 채화장은 월계화로 만든 잠화를 푸른빛이 도는 담비 털 위에 올렸다. 그 위에는 똑같이 생긴 잠화 하나가 이미 만들어져 놓여있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잠화 두 개를 내려다보던 채화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곡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저들이 저렇게 슬피 우는 이유는 돈 때문이지. 돈을 받고 울어주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삽니다.”
“전쟁이 끝나고 이 집 저 집 불에 타서 노비 문서가 사라졌어. 노비들이 한꺼번에 양인이 되었으니, 그토록 꿈꾸던 세상이 온 게 아닌가. 기뻤지. 그런데 곧 다시 노비가 되더군. 먹을 것이 없으니까. 살 방법이 없으니까. 제 발로 들어가 노비 삼아달라더군.”
채화장은 창백한 표정으로 점점 밝아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이나마 어둠을 누르며 조금씩 밝아오는 게 확연히 보였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 친구에게 말했지. 꼭 다시 오겠다고 말이야. …그게 마지막이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채화장은 호산월의 위로에 더 창백해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호산월은 그의 비어버린 표정을 보다가 초피 위에 놓인 두 개의 잠화를 보았다. 한치도 다르지 않고 쌍둥이처럼 똑같은 두 개의 잠화. 호산월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열어놓은 창문 앞에 섰다.
도성 최고라는 이름 덕분에 양반 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를 얻은 채화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식이 없었고, 그의 아내는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 떠났다. 남들 같으면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을 얻을 텐데,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고 먼 친척을 양자로 들였다.
‘부인에 대한 마음이 깊다면, 어째서 남자들이 관에 꽂는 잠화일까? 월계화로 만든 똑같은 모양의 잠화.’
날이 점점 밝아왔다. 이제 촛불을 꺼도 시야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집안사람들의 곡소리만 점점 더 거세졌다. 채화장은 여전히 꿈속을 걷듯 초피 위의 잠화를 바라보느라,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분은 기축년 때 죽도에 계셨습니까?”
호산월의 말에 채화장이 고개를 돌렸다. 망건 아래 이마에 주름이 졌고, 흰털이 섞인 수염이 입술을 감출 만큼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호산월은 창문을 닫고 벽에 걸린 대나무 그림을 떼서 탁자로 가져왔다.
“그해에 두 분은 스물을 넘긴 청년들이었겠지요?”
“나는 스물둘이었고, 치윤이는 스물이었지. 처음 만난 건 열일곱, 열다섯 때였어.”
“혼례를 올려야 하는 나이였네요.”
채화장 백씨는 스물둘의 청년으로 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나는 혼례를 올리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왔고, 치윤이는 혼례를 거부하고 죽도로 들어가 버렸어. 나는 용기가 없었고, 치윤이는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죽었지. 나는 그 마음을 저버리고, 살아남은 거야.”
오십을 넘은 채화장은 스물둘이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울 듯 웃었다. 아니, 웃는 듯 울었다.
“살아남는 것이 다 그렇지요. 차라리 그때 같이 죽을 걸. 그랬으면 저승길을 걷든, 구천을 떠돌아다니든 함께였을 텐데.”
“내가 정말 두려운 건 … ”
채화장은 공방의 닫힌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밀 것처럼 손을 들었지만 허공에 떠있을 뿐이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없으면 어떡하나?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나를 반가워하지 않으면? 나를 이미 잊었으면? 원망하면? 뼈에 사무치는 한이 남아 원귀가 되었으면?”
호산월은 초피 위에 놓인 잠화 두 개를 들어서 햇빛 아래로 가져갔다. 빛을 받은 월계화는 진짜가 아닌 가짜인데도 아름답기만 했다. 너무나 부드러운 촉감도 향기도 생생하여 비단으로 만든 채화가 아니라 생화 같았다.
“꽃은 죽음으로서 탄생하지요. 하나의 세계가 닫혀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법이잖아요.“
“이 가짜 꽃으로도 그 문이 열릴까?”
“연회를 채화들로 장식하는 이유는 그게 아닐까요? 다시 시작한다, 영원히 약속하자.“
“영원히 … 함께.“
“문을 열지 않으면 그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기회는 영영 사라집니다. 그분을 다시 만날 기회도 사라지고, 그분과의 약속을 지킬 기회도 사라지겠지요.”
채화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레 공방 문을 조금 열었다. 그러더니 굳게 닫아걸었던 문을 밀고, 호산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호산월은 그의 손에 월계화로 만든 잠화 두 개를 올려주었다. 햇빛 속으로 채화장이 걸어갔다.
그는 점점 채화장이 아닌 백선호로 변해갔다. 빛 속에 스무 살의 정치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백선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정치윤을 바라보았다. 백선호는 정치윤의 갓에 잠화를 꽂았고, 정치윤이 백선호의 갓에 잠화를 꽂아주었다.
멀리서 청지기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곡소리가 잦아들었다. 호산월은 벗어두었던 남바위를 다시 머리에 쓰고, 채화장의 공방에서 나왔다.
아주 멀리 빛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 두 남자가 보였다. 흰 도포에 갓을 쓴 두 남자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머리에 꽂은 월계꽃으로 나비가 날아들었다. 이보다 흥겨운 연회는 없을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