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내내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아직 벚꽃 구경도 못 했는데, 다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추운 날씨를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따뜻했고 반짝이는 봄날이 왔다.
“그래! 바로 오늘이야. 가자!”
나는 여권을 만들기 좋은 날이라는 주문을 걸고, 출근하는 길에 구청을 들리기로 했다.
구청 가는 길은 복잡했지만 햇빛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좁은 길에 가로수를 다 잘라내는 중이라 잘린 나뭇가지가 잔뜩 쌓였지만 ‘향기 좋네.’하며 웃었다. 여러 개의 오래된 건물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민원실을 찾기 어려워 헤맸지만 설렜다.
“어디 가세요?”
“민원 여권과요.”
“저쪽으로 가서 길을 건너서 1층입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러 나온 구청 직원의 도움으로 뚝 떨어져 있는 민원실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좁은 길을 지나 길을 건너야 했지만, 덕분에 햇살 아래 여전히 피어있는 벚꽃을 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춥고 비 오고 바람 불던 날씨에도, 그 얇고 보드라운 벚꽃 잎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왠지 대견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드디어 여권과에 도착했다. 처음 여권을 만드느라 잔뜩 긴장했던 나는, 대문자로 쓰라는 영문 이름을 소문자로 써 버렸다. 아! 이런…
점심시간이 다 되어 창구 두 개 중 한 창구는 문을 닫았다. 내 앞에는 가족이 여행을 가는지, 젊은 여자가 아이들의 여권을 만들고 있었다. 혼자 자유여행을 계획 중이라, 조금 부러웠다.
여권도 처음인데 계좌이체를 해야 해서, 잔뜩 얼어 내 차례만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하다가 드디어 파란 의자에 앉았다.
사진이 실물과 다르다고 할까 봐 긴장해 있는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지문으로 확인이 안 되니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버님 이름이요?“
“어머님 이름이요?”
“본적지는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들이 나를 증명하고 있었다. 가본 적도 없는 본적지가 나를 증명하는 장소였다. 나는 그냥 나인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 그냥 나는 없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딸이었다. 여행 가서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할 수 있는 내 동생의 언니였다. 내 나라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외교부에서 여권을 발급한다니까, 갑자기 내가 이 나라에 속해 있다는 실감이 확 몰려왔다.
내 인생에 꼭 한 번은 다른 나라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권 만들기가 오히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 곁에서 떠난 아빠도 이제 막 아빠의 곁으로 떠난 엄마도 영원히 내가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열흘 정도 후에 찾으러 오라는 접수증을 받고 민원실에서 나오는데, 햇살이 정말 반짝거렸다. 구청 앞 도로에서는 나무의 가지를 몽땅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구청 사거리를 지나 학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복잡하고 좁은 도로를 걸으니 넓은 차도가 나왔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할 일이 있고, 내가 속한 사람들이 있고, 벚꽃이 필 무렵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에게 글짓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시를 썼다고 보여준다. 학교에서 시 쓰기 대회에 나간다고 전해준다. 이제 알겠다. 떠나야 나를 찾는다는 그 말의 의미를.
햇살이 눈이 부실 만큼 반짝거렸다. 벚꽃이 살랑거리고, 버스 기사는 정거장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출발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실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