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에도 지금 처럼 즐겁게 뛸 수 있기를
작년 11월 즈음이었다. 내가 러닝을 시작하게 됐던 때가. 그때를 돌아보면 참 힘들어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불안정한 상황 그에 따라 한껏 불안정한 마음.
그런 상황에서 오후 정해진 시간에 필라테스를 하고, 그에 이어서 러닝을 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일단 누군가 일 때문에 날 찾을까 걱정됐었고, 집에 늦게 들어가면 와이프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물론 한두 번 긴급한 콜이 온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운동을 끝까지 하고 자리에 가서 일을 하면서 대응하면 됐고, 아이와 와이프도 그 시간에 공부를 했기에 내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막상 일을 했어도, 집에 있어도 무의미하게 보냈을 시간이 그렇게 내 몸과 마음에 알찬 시간이 되었다.
작년 11월이었으니 벌써 러닝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적어도 필라테스가 있던 날은 했으니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했고, 주말에도 시간이 나면 야외에서 달리기를 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에는 겨울이라 경량패딩에 긴바지를 입고 뛰었는데 지금은 반팔 반바지를 입고 뛴다. 6개월 동안 난 무엇이 달라졌을까?
가장 확실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게 신체 지표일 것이다. 처음 러닝을 시작할 때 이렇게 계속할 줄 알았다면 몸무게를 미리 꾸준히 재봤을 텐데, 처음에는 거의 재질 않아서 일단 있는 자료로 비교해 보면, 러닝 시작 전에 비해 몸무게는 약 7kg가량 감소됐다. 분명 이 무게가 모두 지방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갤럭시 워치로 측정한 인바디 결과를 보면 체지방은 몸무게는 줄었지만 기간 상 큰 차이가 없다. 근력운동은 아예 안 했기도 했고, 그간 쌓아온 내장 지방이 쉽게 없어지진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다. 최근 들어 날이 더 더워져 땀을 많이 흘렸기에 체수분이 줄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뱃살이 줄었다. 예전에는 벨트 안쪽 끝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구멍이었는데 이젠 가장 안쪽 구멍도 여유롭다. 벨트를 자를지, 구멍을 새로 뚫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10km를 한 시간에 뛰어봐야겠다는 목표 하에 시간 단축에 많이 매달렸다. 그래서 540 정도에 맞춰 뛰도록 노력했었는데, 막상 하다 보니 무릎이 아파지고, 힘들기도 하고, 내가 저 기록을 달성해서 뭐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기록이 단축되지 않아서 한계에 부딪혀 재미를 잃은 것도 있었다. 무릎 부상을 치료하면서 든 생각은, 그냥 기록은 생각하지 말고, 건강을 위해 뛰자였다. 그래서 아프지 않기 위해 그리고 건강을 위해 느린 속도로, 하지만 뛰는 시간을 늘리는데 집중했다. 처음에는 800 정도로 5분 뛰고 바로 600 페이스로 넘어갔는데, 요즘은 적어도 10분은 850 정도로 파워워킹을 하고 점점 속도를 높여 느린 조깅을 한 후 600을 시작하고 20분 지난 후에 500으로 잠깐 뒤고 다시 쿨다운을 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이런 슬로우 스타트가 확실히 무리도 덜 가는 것 같고 이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러닝머신 10km도 곧 달성할 듯싶다.
멀리 뛰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신경 쓰는 것은 심박수이다. 최대한 심박수를 낮춰서 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려는 노력인데, 그리기 위해서 뛰는 보폭도 줄이고 바닥에서도 최소한의 높이만 위로 뛰려고 한다. 마치 바닥에 붙어서 뛰듯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달리는 중에는 댄스 음악보다는 어쿠스틱을 들었는데, 어느 순간 음악은 있으나 마나 한 상태가 되곤 했다. 딱히 내 페이스를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백색소음 느낌? 그래서 다른 걸 해볼까 하다가 발견한 게 오디오북이었다. 오디오북은 대부분 낮은 톤으로 이야기를 읽어주기도 하고 요즘은 책을 잘 안 보게 되는데 오디오북 덕분에 러닝 하는 하루 40~50분을 독서시간으로 보내게 되니 독서량이 자연스럽게 늘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이 '삼체'였고 2주 정도 달릴 때마다 들으니 완독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을 헤아려 보니 벌써 9권을 읽었다. 아마 러닝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종이책으로 읽지 않았겠고, 오디오북으로도 읽다가 다른 걸 했을 텐데, 다 러닝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나만 생각하며 살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마흔이 넘으면서 난 내 의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난 굳이 앞으로 가고 싶지 않은데, 난 잠시 멈춰 있고 싶은데, 유수풀에서 튜브에 의지해 떠있는 것처럼 난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러닝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주었다. 혼자 조용히 뛰다 보면 생각나는 건 달리는 것 자체 밖에 없다. 누군가 떠밀어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앞으로 가고 싶어서 간다. 땀이 흐르면 닦고, 힘들면 쉬면 된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내가 목표로 한 할당량을 채우면 나 자신에게 칭찬하며 오늘도 내가 해냈다란 성취감으로 쿨다운을 한다. 매트에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비 오듯이 땀이 흐르고, 여기저기 근육을 풀다 보면 기분이 너무 좋다. 내가 살아 있는 기분. 그렇게 땀을 다 식히고 근육도 풀고, 시원하게 샤워하고 나면 왠지 내가 멋있어 보인다. 흔한 샤워 후 나르시즘 일 수도 있지만 덧없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씻고 나왔을 때랑은 느낌이 다르다. 이건 온전히 나만을 위해 보낸 시간의 결과니까.
러닝 시작 1년 후인 내년 봄쯤에는, 10km 마라톤에 나갈 수 있을까?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젠 다른 생각이 든다.
내년 봄에도 난 뛰고 있을까? 지금처럼 즐겁게 뛰고 있을까?
내년 봄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보다 저 바람이 이뤄지는 게 왠지 더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