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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가 제로의 영역에 들어갔다

뛰고 있지만 숨이 차지 않고 마치 편하게 걷는 느낌

by 구르미




1990년대는 일본의 버블이 한창일 때라 일본에는 돈이 넘쳐났다. 애니메이션 산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많은 아이디어가 몰렸고, 상상할 수 없는 돈의 힘으로 지금에 봐도 어색하지 않은 작화가 가능했다.


친구들과 비디오테이프나 VCD를 돌려보며 여러 만화를 봤었는데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신세기 사이버포뮬러'였다. 그중에도 '제로의 영역'에 대한 에피소드를 참 좋아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 (1994)

주변이 뿌옇게 변하면서 제로의 영역에 들어가고 초인적인 감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


러닝 이야기를 하면서 웬 만화 이야기인가 싶긴 한데, 러닝을 하다가 흡사 '제로의 영역' 같은 감각을 느꼈다.


매일 하던 루틴대로 필라테스 수업을 듣고 7km로 파워워킹을 시작해서 속도를 점점 늘려서 13km까지 올려서 달리다가 다시 10km로 내려서 끝까지 달릴 셈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무선 이어폰을 까먹고 안 챙겨 와서 아무것도 듣는 것 없이 달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어폰이 없어서 조금 심심하긴 했는데, 근골격 치료에서 받았던 조언처럼 잔걸음으로 달리려고 하고,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차고 나가는 느낌으로 달리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게 12.5km까지 올렸는데 그렇게 힘들지가 않았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가 싶었다. 물론 무릎은 약간 아팠지만.


그리고 속도를 10km로 내려서 달리는데 몸이 너무 편했다.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고, 다리도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다. 마치 천천히 걷는 느낌이랄까?


신기해서 시계를 봤더니 심박수가 125였다. 원래 달릴 때 항상 160 정도였는데.. 이상해서 시계 위치를 조정해 봤는데, 그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는 5.5km까지 달리고 쿨다운 해야지 했는데, 힘이 들지 않아 달리다 보니 7.5km까지 달렸다.


이 느낌이 너무 신기해 GPT로 물어봤더니, Flow state 또는 명상에 빠진 상태였다고 한다. 러너들이 가끔 겪고, 빠지길 원하는 상태라고 한다.


'이 정도면 하프도 하겠는데?' 란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에도 이 상태에 빠질 수 있을지가 문제다.


이 상태에 빠질 수 있었던 조건을 정리해 보면,

1. 무음으로 달려 내 몸에 온전히 집중하여 달렸다. 마치 명상을 할 때 내 몸에 온 신경을 집중하듯이.

2. 천천히 속도를 올려 몸이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하였다.

3. 동일한 속도를 유지해 몸이 안정을 찾도록 했다.

정도가 생각난다.


너무 기분이 좋았기에 바로 다음날에도 또 뛰고 싶었지만, 혹시나 전처럼 무릎이 아플까 봐 오늘은 러닝을 쉬었다. 내일이 기대된다.


혹시 당신도 이런 명상 상태에 빠져보셨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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