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발달 장애인도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랫동안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장애인은 항상 ‘약자’, ‘불쌍한 사람’, ‘번외의 존재’로 여겨졌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장애인의 모습은 대체로 애잔한 배경음악 속, 힘겹게 살아가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기부를 요청하는 광고에서 더 자주 등장했고, 거기서의 장애인은 ‘최대한 불쌍해 보여야 했다.’ 그래야 보는 사람들이 “그래, 난 저 사람보단 낫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야지.” 하며 ARS를 눌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흔히 ‘빈곤 포르노’라 불린다. 모금된 돈이 실제 장애인보다는 운영 단체의 비용으로 더 많이 쓰인다는 뉴스들을 보면서, 그마저도 장애인은 소모되고 버려지는 존재가 되는구나 싶었다. 또, 집 주변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고 하면 이유 없이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장애인을 단순히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하고 싶지 않은 대상—어쩌면 ‘썩은 사과’처럼 취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씁쓸함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너는 내 운명’ 400회 특집은 미디어가 보여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정은혜 작가의 그림을 본 기억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의외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라는 호기심이 먼저였고, 덕분에 평소 보지 않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됐다.
영상을 보며 깨달았다. 나 역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왜 행복하면 안 되지? 왜 우리처럼 살면 안 되지?’
그 질문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발달장애인 부부의 사랑은 단순했다. 애정 표현을 하고 싶으면 했고,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고, 화가 나면 화를 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래도 되나?’ 싶은 행동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들의 방식이었고 그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기보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바라봐야 한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내가 반성했고, 어느 순간 부모처럼 흐뭇하게 지켜보게 됐다.
물론 걱정도 있었다. 정은혜·조영남 부부는 발달장애인 중에서도 대화가 가능하고 자립이 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경우일 수 있다. 현실 속엔 더 큰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혹시나 누군가가 “왜 장애인만 지원하느냐, 불공평하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우려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장애인이 잘 산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가 있을까? 모두가 함께 행복한 것이 진정한 복지 국가일 것이다. 그게 조금 더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의 의무 아닐까. 발달장애인은 무조건 떠받들어야 할 존재도, 무조건 불쌍하게 여겨야 할 존재도 아니다. 그들도 사회의 구성원이고, 함께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오랜만에 따뜻한 방송을 보고 마음이 즐거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됐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