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을 읽고 꾼 정오의 꿈
소설을 시작한다—는 말로 장을 설정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도 영리한 방법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되,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을 원하는 만큼 드러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소설을 선언한 채 무책임하게 얘기해 보겠다. 나는 내 아버지를 혐오한다.
나는 내 아버지를 _____다. 아마 이 빈칸에 어떤 부정적인 단어를 써도 수긍할 것이다.
최근의 일이다. 회사 근처에 살고 있는 나는 밥을 포기하는 대신 잠깐의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청바지도 벗지 않은 채 누운 침대 머리맡에는 읽고 있던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이 펼쳐져있었다. 서부개척 당시 멕시코인과 인디언을 토벌하는 미국인 용병들을 그린 이 작품은, 내게는 너무 잔인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코를 베어 사상자 수를 세었듯, 인디언의 머릿가죽을 벗겨내어 벽에 걸었다는 대목에서 더욱 그랬다. 무튼 그 옆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현재의 '탈조선' 열풍에 따라 나와 부모님은 해외로 향했다. 어느 나라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글거리는 태양과 황톳빛 건물, 아마도 미국 남부였으리라. 나는 그곳에서 운 좋게도 낡은 현대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신히 성기게 뭉쳐진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은 강아지의 죽음으로 또다시 붕괴되었다. 일을 해서 가족을 이끄는 사람을 가장이라고 한다면,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집안의 가장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시대의 관습에 머물러있던 나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은 수행하지 않은 채, 마치 언제부터 퍼졌는지 모를 이끼처럼, 방 한구석 모퉁이에 그렇게 존재만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주 후에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선언했다. '나의 집에서 나가라'라고. 그리고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한심한 종자가 보이지 않으니 깨끗한 삶은 이제 도약할 일만 남아있었다. 나를 끌어내리는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아마도 현지인들과 무결한 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퇴근 시 항상 지나는 4차선의 도로의 낮에는 아지랑이가 끓었다. 직장과 가까운 집을 잡은 탓에 나는 일찍 출근하고 점심때는 집에 들러 잠깐 잘 수도 있는 특권을 얻었다. 그날의 점심에 집에 갈 때 중앙선 너머 가까운 차선에 정차해 있는 파란 차를 보았고, 꽤나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통행량이 많지 않은 이 도로의 특성상 진작에 비보호 좌회전을 했음직하기 때문이다.
잠깐의 꿀 같은 낮잠—몽중몽—을 즐기고 다시 직장에 가는 순간—불행히도 아까 그 지역은 언덕이었다—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파란 차의 후방에 차를 들이받아버린 것이다.
불투명하게 보이는 그 차의 운전자는 고개가 꺾여있었다. '죽었나? 그렇게까지 큰 충격은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정상적인 각도로 고개를 들어 좌우를 돌아보았다. 졸았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좌회전을 해—아마 그 차가 목적했을— 어떤 뚫린 차고 같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시동을 끄고 주차한 뒤 나온 순간 시간이 제법 지나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나온 집이 과거에 놔둔 향수처럼 그리웠던 것이다. 밖으로 나와보니 적어도 열 대는 돼 보이는 차들이 뒤엉켜 대사고가 나있었다. 몇몇 경찰들은 밖으로 나온 사람들과 대화하며 무언가를 종이에 끄적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엿들은 바로는, 언덕 꼭대기에서 파란 차가 제어를 잃고 내려왔고, 앞에 서있던 차들이 연쇄추돌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란 차에 탄 운전자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며 아마 많은 손해배상을 물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 커져버린 사고의 발단이 나라는 사실이 꺼림칙해 그중 한 명의 경찰을 붙잡아 차고로 돌아왔고, 사정을 말했다. 한국처럼 cctv가 많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 사고의 시발점이었다는 걸 들킬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다. 단순히 양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찰은 왜인지 귀찮은 모양새를 하며 한두 글자를 노트에 적는 척하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안심하며 거리를 걸어갔을 때에는 예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주던 그 석양은 지고 전형적인 대도시의 밤이었다. 한동안은 차로 출퇴근하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본 것은 내가 내다 버린 나의 아비와 볼품없는 강아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는 날씨에 맞지 않는 더럽고 커다란 빨간 패딩을 입고 있었다. 온몸에 검댕이 묻었으며 희끗하고 숱 없는 머리는 그를 부랑자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강아지는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죽은 강아지 대신임을 깨달았다—털이 하나도 없었고, 표주박처럼 앙상한 몸을 떨어댔다.
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외국의 쓰레기통은 중앙부가 크게 뚫려 뒤지기 쉬운 모양이었다. 비교적 온전한 감자칩을 집어 더러운 손으로 먹는 내 아비의 이빨은 반이 빠져있었고 잇몸에서는 누런 고름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화를 내면서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왜 이런 걸 먹냐고, 어디서 머무냐고 물었다. 강아지는 바닥의 음식을 먹고 있는데 그는 말했다. 나는 부랑자라고, 집이 없어서 잘 곳이 없다고. 자존심마저 버린 듯했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그는 내 눈을 피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가졌던 혐오감과 상관없이 빨리 집으로 가자고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에게 그 집은 자신의 집이었을까?—
집에서는 꽤 먼 곳이었는지 한참을 걸어도 집은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우리는 번화한 백화점과, 에펠탑 같은 건물과 시린 듯 빛나는 도로를 지났다. 나는 손을 놓았다. 초등학생 이후 잡은 적 없는 그의 손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악취가 느껴졌고, 나는 집에 가자마자 씻으라고 말했다. 그는 머뭇거리는 듯 너무 더러워서 구정물이 나올 거라고, 근처 공원에서 한번 씻고 가겠다고 했다. 문득 일부로 돌아서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한 조명 아래 거리는 너무도 삭막했다. 걸어도 걸어도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불에 눈물이 흐르는 눈을 비비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점심시간이 거의 끝난 후였다. 엉망인 몰골을 수습할 새도 없이 나는 차에 올라 다시 직장에 갔다. 참석할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후 내내 존엄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가끔 보이는 아비의 구부러진 등과 혼자 먹는 밥, 그리고 외로움과 한심함에서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어머니의 젊음을 앗아간 그에게 쌤통이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꿈에서 깨어나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행지에서 부랑자를 본다면 그저 그들을 부랑자로 인식한다. 만약 그들이 유년기에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로 인해 거리에 나앉았음을 알게 된다면 안타까울 것이다. 어쩌면 멀찍히서 동전을 던질 수도 있다. 아는 사람이 부랑자가 되었다면 나는 아마 그가 다시 설 수 있도록 각종 센터와 제도를 소개해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이 그렇게 된다면?
꿈에서 본 광경은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 존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존엄성을 잃었을 때 받는 충격. 아마 그것이 공감의 범위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친족으로 그 범위를 둔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범위를 좁히고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그 범위를 나와 관련 없는 누군가—약자인 사회 구성원, 어쩌면 동물—까지 확장한다. 이 공감은 단순히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는 종(공동체) 전체의 존엄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한강,『흰』p.135
그렇기에 존엄할 권리는 중요한 문제다. 존엄사를 찬성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가 '존엄'한 지의 경계이다. 치매에 걸려 배변 조절을 못하는 것은 존엄하지 않은 것인가? 존엄성을 버리고 싶은 개인의 자유는 무시되어야 하는가? 단순히 지식인 계층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이는 제국주의의 명분이 되었던 '야만성'과 '계몽'과도 관련이 있다.
무수한 인간의 얼굴 가죽이 걸렸던 그곳에서 나는 아비의 존엄성을 생각했다. 그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적어도 얼굴은 있으니? 스티븐 핑커는 폭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진보하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얼굴 가죽이 벗겨질 위험은 없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빈곤뿐이다. 그렇지만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 연약한 나는 고작 그런 것에도 눈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