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 Feb 17. 2024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가면 콰지모도를 볼 수 있을까?

노트르담 성당 방문기


몇 년 전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파리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였다. 화재 복원 공사를 하려면 수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는 보도를 보고 나서 '아, 이제 노트르담 성당에 구경 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보수공사 완공을 앞두고 있다.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사물을 바라볼 때가 많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가면 콰지모도(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주인공 이름)가 아직 종을 치고 있을 것 같고,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집(사실은 베로나 시에서 관광상품용으로 민가를 구입하여 꾸며놓은 집)에 가면 아직도 줄리엣이 2층 발코니에서 로미오를 기다릴 것 같다.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여행사들이 이러한 것들을 내세우며 여행상품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원작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콰지모도 와 에스메랄다의 슬픈 이야기이다.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는 여러 개의 버전이 있는데 앤서니 퀸이 주연한 영화가 가장 유명하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콰지모도 역을 하던 배우 앤서니 퀸은 이미 별이 되었다. 나는 다른 버전은 보지 못하였다. 그 후로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원작을 여러 번 재탕하는 것으로 아는데, 원작은 영화로 한번 재탕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장르를 바꿔가면서 원작을 여러 번 재탕하는 것을 거의 보지 않는다.


10여 년 전에 생전 처음 여행사를 통하여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간 적이 있다. 당시 아침부터 사람들이 성당에 입장하느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솔자가 나에게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하였다. 몸이 불편한 내가 수많은 인파로 인하여 안전사고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한가하게 그 부근을 산책하면서 보내는 것이 오히려 더 좋았다.


파리 시내와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섬( 그 당시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센 강 가운데 있는 섬에 위치하고 있고 그 섬 이름이 시테섬이라는 것도 몰랐다)을 연결하는 다리 위를 거닐면서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가 생각이 났다. 나는 당시 '지금 저 성당 안에 들어가 봐야 콰지모도도 없고 관능적인 여인 에스메랄다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성당이라면 오히려 보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어딘가 숨어 있을 법한 노트르담 성당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마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해 섭섭해하는 마음을  보호하고자 나의 심리적인 방어 기제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발동하였는 지도 모른다. 때로는 객관적인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영원히 환상만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파리 시내와 시테섬을 연결한 다리를 거니던 중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댕~댕~댕~ 아, 정말 종소리가 마음을 때린다. 아마 노트르담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였을 것이다. 저 종소리는 중세 시대에서도 지금처럼 똑같이 올렸을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저 종소리는 영원히 울릴 것이다. 세느강변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나를 어느덧 중세로 시간 여행을 보내준 것 같다.


사실 유럽의 성당이라는 게 안에 들어가 봐야 어느 성당이나 다 비슷비슷하다. 건축 전문가의 눈에는 고딕식이니 로마네스크식이니 하는 건축 형식을 보겠지만 우리들 눈에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울긋불긋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햇빛이 들어올 것이고 성경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나 기타 성경에 등장하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있을 것이다.  성당 안은 어두 침침한 조명일 것이고 혹시 미사를 보고 있는 중이라면 인기척이 나지 않게 조용히 있다가 나와야 한다.


나는 노트르담 성당이 파리에 만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약간 유식해지면서 그게 고유명사가 아니라  '마리아를 모신 성당'이라는 뜻이고 사르트르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항상 객관적인 사실(팩트)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는데 때로는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지가 때로는 더 중요하다. 콰지모도가 노트르담 성당 안에 아직 존재하고 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콰지모도가  존재하리라 믿고 환상을 가지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아직도 노트르담 성당 안에 들어가면 콰지모도가 종을 치고 있고 관능적인 자태를 가진 에스메랄다가 나를 기다릴 것만 같은 즐거운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아직 노트르담 성당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성당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러한 즐거운 환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노트르담의 꼽추 영화 포스터

                                                   

작가의 이전글 내가 아직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지 않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