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 있으면서 아메리카박물관에 한번 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스페인은 왕년 제국 시절 중남미 이하 거의 모든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문화적인 축적이 대단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내일은 마드리드를 출국하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을 것 같아 오늘 방문하기로 하였다. 교통편을 살펴보니 메트로역에 내려서 700미터 이상 걸어가야 할 것 같다.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10회나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를 구입하였는데 1회만 사용하고 쓰지 못하게 되어 아깝기는 하다. 아메리카박물관은 시내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박물관 입구
아메리카박물관은 시내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박물관이 아니라서 그런 지 관람객도 별로 없다. 나는 이렇게 사람들이 뜸한 장소가 좋다. 사람이 많으면 정신도 없고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장애인복지카드를 내밀었더니 입장료를 내라는 말이 없이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장애인은 무료입장이었다. 한국어로 된 장애인복지카드를 인식하였을 리는 없고 목발 짚은 사람이니 장애인이라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1층(한국에서는 2층)부터 관람이 시작되는데 초입 부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용하던 무기류, 장신구들이 보인다. 전시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방대한 양이다. 중남미의 각 나라 별로 구분해 놓은 전시관도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아메리카'라고 하여 '미국'만을 생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아메리카’란 우리가 통상 생각할 수 있는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 남미 모두를 포함한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모두 스페인어로 되어 있어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세계를 통치하였던 스페인이니 자기 나라의 문화를 알고 싶으면 스페인을 배우라는 의미일까, 이 정도의 규모라면 영어로 된 설명서가 있을 만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아니므로 그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코르테스, 잉카문명을 멸망시킨 피사로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었다.(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출신) 스페인이 이러한 나라들을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었기에 축적된 문화적 유산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하였다.
신대륙에서는 유럽처럼 고대문명이니, 중세문명이니 하는 것들이 없다. 아즈텍이나 잉카 같은 유적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물론 고대니 중세니 하는 것들도 훗날 역사가들이 구분해 놓은 것이다. 유럽의 박물관에 가보면 고대나 중세 문명의 흔적이 있어 볼 만한 것이다. 일전에 시드니에 있는 호주 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고대와 중세가 없으니 무언가 큰 덩어리가 빠져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호주 역시 영국의 제임스쿡 선장이 호주를 발견한 이후의 문명이다. 호주 원주민들의 문화가 궁금하였는데 살펴볼만한 것이 별로 없어 아쉬웠던 적이 있다.
유럽처럼 찬란한 고대문화나 중세문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였는지 매우 궁금하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긴 하나 그들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엿보고 싶은데 박물관의 문자가 모두 스페인어로 되어 있어 답답하다. 그날은 오후 3시까지 오픈하는 날이라 마감시간에 쫓겨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왔다.
아메리카관 입구
인디언 문화
페루 에쿠아도르
페루(미케네의 아가멤논 가면과 비슷) 아마존 지역의 유물
마야. 인디언(티피), 아르헨티나
아메리카박물관을 보고 나서 아직 시간이 남아서 말로만 듣던 스페인광장이라는 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특별히 볼거리는 없이 그냥 광장일 뿐이다. 광장 끝에는 스페인 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돈키호테와 그의 동반자 산초의 동상이 서있다. 내가 언제 여기 오겠는가 싶어 셀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오니 숙소 주인이 파에야를 시켜 먹으면서 내가 먹을 분량을 남겨두었다며 데워서 먹으라고 한다. 오랜만에 카레가 듬뿍 들어간 볶음밥 비슷한 것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커다란 새우도 들어가고 밥양이 제법 많았다. 그날 저녁 나는 10일 동안의 마드리드여행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나름 이번 여정에 대하여 만족한다. 다음 기회에 스페인의 다른 지역도 살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나의 페이스북에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날 밤 소회를 간단히 남기기도 하였다.
귀국하는 날. 마드리드의 바라하스 공항터미널은 무려 4개나 되기 때문에 어느 터미널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대한항공의 출국장은 1 터미널이다. 공항이 워낙 넓어서 엉뚱한 터미널에 내리면 낭패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정확히 이야기해주어야 하는데 내 발음이 시원치 않아 착오가 생길 수 있으므로 숙소 주인에게 부탁하였다. 숙소 주인은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정확히 ‘온스’라고 발음하였다. 스페인어로 1이라는 뜻이다.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그리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았다. 출국장문을 열고 들어가니 왼쪽으로 대한항공의 로고가 보인다. 아, 저기가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구나! 나는 귀국 시에도 휠체어서비스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둘러보니 휠체어가 몇 개 보이고 직원들이 있는 코너가 보인다. 휠체어서비스센터도 찾았다.
바라하스 공항 대합실
교통약자를 위한 전동차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위한 서비스센터
대한항공 체크인카운터에는 한국인 직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 사람인 듯한 여직원과 의사소통에 착오가 있어 내 캐리어를 수화물로 부치지 않고 기내로 휴대하게 되었다. 내 캐리어는 작아서 기내용으로도 충분히 휴대할 수 있어 보여 휴대할지 수화물로 부칠 지 여부를 물은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고 답변을 잘못한 것 같다.
휠체어서비스요원은 나의 휠체어를 밀고 한참이나 간다. 체크인카운터부터 보딩게이트까지는 상당히 멀어서 걷기에는 무리할 것 같다. 휠체어서비스요원은 나를 탑승구까지 데려다주는데 가는 도중에 같이 전동카트를 타고 가기도 했다. 보딩게이트까지 오니 비로소 한국인 직원이 보인다. 그제야 나는 말문이 트였고 한국인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어쨌든 나는 무사히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마드리드를 이제 떠나는구나! 왠지 아쉽다. 처음 친구를 사귀어 서로 좋아할 쯤 되었는데 헤어지는 느낌이랄까.
바라하스 공항 출발 직전
마드리드도 다시 가고 싶은 도시이다. 작열하는 태양,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 깨끗한 공기, 이슬람과 기독교가 오묘하게 섞여 있는 문화. 나는 10여 일 동안 마드리드의 껍데기만 보았을 것이다. 진짜 마드리드의 속살도 보고 싶은데 나에게 그런 기회가 또 올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