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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의 카디프

by 이 은

거의 9시쯤이 다 되어서야 카디프에 도착했다. 카디프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이번 숙소는 두 아이가 있는 부부가 셰어하우스 형식으로 운영하는 에어비앤비였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데 아무래도 도심이 아니어서 매우 어두웠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매우 조용한 동네에 우리 둘의 요란한 캐리어 끄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다행히 숙소를 금방 찾을 수 있었고, 두 아이의 아빠이자 호스트의 남편인 비니는 우리를 환대해 줬다. 20kg가 넘는 캐리어를 들어 우리의 숙소인 2층까지 올려다 주는 친절함도 보였다.

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방은 매우 아늑했다. 심지어 넓은 화장실까지 구비되어 있어 오늘은 런던에서보다 더 푹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는 마음껏 오래 씻고 얼굴에 팩을 올리고 누워 잠에 들었다.

풍성한 아침식사

이른 아침 비니, 앨리스 부부와 아이들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잠이 깼다. 대충 눈곱만 떼고 1층으로 향했다. 앨리스는 잘 잤냐며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은지 물었다. 비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여러 가지 메뉴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따뜻하게 구워준 크로와상에, 시리얼 그리고 오렌지 주스까지. 너무 든든한 식사였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귀가 빠지도록 집중했지만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주디언니를 통해 전해 듣기도 하고, 아는 영어를 끌어 모아다가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퇴사를 했어. 그래서 유럽에 왔고, 카디프가 궁금해서 오게 됐어."라고 말하자 비니는 환호성을 지르며 "퇴사 축하해! 행복한 유럽 여행이 될 거야."라고 응원했다. 그 응원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우리가 머문 집의 대문

우리는 준비를 마치고 외출을 했다. 눈앞에 어젯밤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지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런던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카디프의 아침 풍경

하지만 아쉽게도 날씨가 흐렸다. 아마 비가 올 거라는 앨리스의 말에 우리는 우산을 챙겼다. 그래도 낯선 동네에, 살면서 한 번도 와보지 못할 곳에 와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우리는 국립박물관과 시청, 카디프 성을 구경하기로 했다.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지만 너무 예뻤다

닿는 곳곳이 모두 따뜻한 풍경이었다. 어쩜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감탄을 연발했다.

IMG_8229.JPG 유독 인물화 앞에서 자추 멈추게 된다

처음 간 곳은 카디프 국립박물관이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 기대됐던 점 중 하나가 좋은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었다.

IMG_8231.JPG 노부부의 뒷모습

여러 가지 작품뿐만 아니라 느긋하게 많은 이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했다. 한 노부부가 함께 관람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감상했다. 박물관 안에는 자연사 전시관도 있다. 옛날에 볼 수 있던 동물과 지형에 관한 설명이 많이 있었다. 웨일스도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기억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IMG_8306.JPG 웨일스 카디프 성

한두 시간 정도 관람을 마치고 다음은 카디프 성으로 향했다. 내가 카디프에 온 이유였다. 사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영화 <Me before you>에 주인공 윌은 하반신 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끌고 다닌다. 어느 날, 루이자와 함께 휠체어로 성을 마음껏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걸을 수 없는 윌이 휠체어로나마 달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때 그곳이 카디프 성인줄 알았다. 그래서 주디언니에게 가자고 했던 것인데, 자세히 찾아보니 그곳은 웨일스의 펨브룩 성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같은 웨일스라는 것에 위안 삼으며 카디프에 오기로 한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카디프 성을 본 순간, 계획을 바꾸지 않은 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IMG_8292.JPG 카울(양고기 스튜)

한참 구경을 하다가 허기가 졌다. 어떤 음식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웨일스에 '카울'이라는 전통 음식이 있다고 해서 식당을 찾아갔다. 예전에 케냐에서 잘못 먹은 적이 있어서 양고기는 조금 두려웠지만, 전통 음식이라고 하니 용기 내서 먹었다. 생각보다 슴슴하고 맛있었다. 특히 비 오는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뜨끈한 국물이었다.

IMG_8351.JPG 카디프 마켓

이후에는 카디프 마켓으로 향했다. 축구의 나라인 영국 소속인 만큼 길거리에는 많은 아저씨들이 축구 유니폼을 입고 맥주를 마시며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혹여나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여 살짝 긴장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아예 신경 쓰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도 편하게 그 분위기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품샵과 오래된 책방도 구경하고, 과일과 채소를 파는 점포도 잔뜩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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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가게도 빠질 수 없었다. 웨일스 국기에는 레드 드래곤(적룡)이 그려져 있어 빨간 용이 상징이라고 한다. 주디언니와 적룡 모자를 쓰고 거울을 봤는데 우리 모습이 너무 웃겨서 깔깔거리면서 즐겼다. 부피 때문에 살 생각은 못하고 대신 우리는 마그넷을 잔뜩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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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을 다 마친 우리는 한 카페에 들어와 몸을 녹였다. 런던에서는 셔츠 한 장으로도 충분했는데, 비 오는 웨일스는 니트를 입어도 추웠다. 한국에서 아이스커피만 마시던 우리는 점점 따뜻한 카페라테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렇게 쌀쌀한 날 마시면 진짜 몸이 사르르 녹는다.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대충 저녁을 때우고 숙소로 향했다. 비에 젖은 신발을 보더니 앨리스가 깜짝 놀라며 히터 앞에서 말리라고 안내해 줬다. 심지어 빨래가 있다면 돌려주겠다면서 우리를 챙겨줬다.(대부분 에어비앤비에서 세탁은 비용을 따로 받는다.) 우리는 그렇게 마치 본가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짐 정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짧디 짧은 카디프에서의 밤이 지나갔다.

IMG_8365.JPG 짐을 푼 지 36시간 만에 다시 짐을 챙긴다

다음 날, 9시 반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 짐을 푼 지 36시간 만에 다시 짐을 챙겼다. 유럽에서 첫 번째 숙소인 런던 숙소를 나올 때는 오히려 후련했는데 카디프에서 떠나려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외국에서 온 여자 성인 2명을 환영해 주고 친절히 대해준 비니와 앨리스 덕분일까. 우리는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며 기념사진도 찍고 인사를 나누었다.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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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양 어깨와 한 손이 무겁도록 짐을 챙긴 후 우리는 다시 런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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