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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 앞, 세대가 스쳐가는 순간을 보다가

지식의 역전의 순간

by Daga

키오스크 앞, 세대가 스쳐가는 순간

맥도널드 매장 안, 사람들의 소음과 햄버거 냄새가 뒤섞인 그곳에서, 나는 우연히 한 모녀의 모습을 포착했다. 딸은 키가 엄마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젊은이다운 날렵함으로 상체가 곧게 뻗어 있었다. 반면, 엄마의 몸은 중력에 조금 더 익숙한 듯, 묘하게 복부 쪽으로 중심이 쏠려 있었다. 나 역시 그 엄마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두드러진 중년의 몸을 지녔다. 젊은 세대에 비해 우리 몸은 세월의 무게를 더 오래 견뎌왔기에 아래로 향하는 걸까? 아니면, 살아온 시간만큼 지혜의 무게도 쌓여가는 걸까? 잠시 그런 상념에 빠져들던 찰나,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물리적인 변화 너머, ‘앎’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전환이었다.

엄마의 손끝은 키오스크 화면 앞에서 머뭇거렸다. 디지털 세상은 그녀에게 낯선 미로 같았다. 하지만 딸은 망설임 없이 화면을 터치하며 메뉴를 골랐다. 단품과 세트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결제 방식을 카드로 선택한 뒤 단말기에 카드를 척척 삽입해 결제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엄마에게 차분히 단품과 세트의 차이를 설명했다. 엄마는 그 설명을 조용히 듣거나, 가끔은 의논하듯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엔 어색함, 당혹감, 그리고 딸에 대한 대견함이 뒤섞인 표정이 스쳤다. 그 순간은 마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장면을 압축한 한 컷 같았다.

이 역전은 키오스크 앞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딸의 언어와 몸짓에선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문화와 유행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엄마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세상의 새로운 지식들이, 딸에게는 이미 일상의 일부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모녀의 ‘역전’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키의 성장이나 몸매의 변화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신호지만, 앎의 흐름이 뒤바뀐 이 순간은 언제부터 잉태되었을까?

아마도 이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온 물결이었을 것이다. 유년기엔 딸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세상의 문턱을 넘었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엄마의 스마트폰을 도와주던 작은 조력자가 되었고, 이제 키오스크 앞에서는 지식의 흐름이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세대 차이를 넘어, 디지털 문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위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원시 시대엔 달리기가 빠른 사람이 집단의 선망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유튜버나 크리에이터가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다. 시대가 달라지며 ‘힘의 질서’가 바뀌듯, 지식의 주도권도 그렇게 이동하고 있었다. 딸이 엄마에게 ‘선생님’이 되는 이 순간이, 어쩌면 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희미한 신호였고, 나는 우연히 그 찰나를 목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경험의 깊이, 변치 않는 빛

젊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디지털 세상에 민첩하게 적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그들의 일상이고, 최신 트렌드는 그들의 언어다. 하지만 딸이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문득 다른 생각에 잠긴다. 만약 내가 그 엄마였다면, 혹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나로서는, 그 소통의 방식에 살짝 아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식의 우위가 관계의 존중까지 앞지르는 듯할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부모님의 아들로 살아오며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고, 뒤늦게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을 때, 그분들의 연륜은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깊이와 넓이를 품고 있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쌓인 통찰은, 젊은 세대가 아무리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익힌다 해도 결코 가볍게 넘볼 수 없는 나침반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새잎이 가르칠 수 없다. 그 나무의 뿌리는 세월이 키운 단단한 지혜다.

성장과 지혜, 그리고 존중의 물결

맥도널드 키오스크 앞에서 펼쳐진 짧은 장면은, 세대 간 지식의 역전이라는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줬다. 동시에, 삶의 연륜이 지닌 무게와 깊이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성장은 앞서 나가는 것이지만, 모든 앎이 곧 지혜는 아니다. 기술 습득의 속도는 강의 상류처럼 맑고 빠르지만, 강은 하류로 갈수록 폭을 넓히고 더 많은 것을 품는다. 세대 간의 물결은 서로에게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기보다, 각자의 속도로 흘러 하나의 바다로 향해야 한다.

그 모녀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사랑과 이해가 존중에서 비롯됨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의 경험과 연륜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키오스크 앞에서 딸이 엄마에게 건넨 작은 가르침, 그리고 엄마가 딸에게 보낸 대견한 미소는, 세대가 스쳐가는 순간 속에서도 서로를 품는 따뜻한 물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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