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어제, 아랫집에서 고독사가 발생한 현장의 복도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닥엔 구더기 번데기의 탈피각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처음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물질이라 여겼고, 건물주에게 청소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화원 아주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놓치지 않았고, 신고를 통해 출동한 경찰은 문 너머에서 싸늘한 시신을 수습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물리적인 흔적은 치워졌지만, 죽음은 냄새로 남았다. 시신이 부패하며 퍼뜨린 냄새는 단순히 역겨운 수준을 넘어,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감각으로 변했다. 매캐하고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그 냄새는 구역질을 유발하다가, 어느 순간 나를 멈춰 세웠다. 장례식장, 정확히는 영안실 주변에서 맡았던, 향냄새와 소독약 냄새 사이에 숨어 있던 그 특유의 기운. 분명히 그 냄새였다.
제주에서 몇 번, 길가에 쓰러져 있던 고양이나 사슴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짧고 강한 악취에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동물의 사체가 주는 냄새는 생명이 꺼진 후의 단순한 부패라면, 사람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쩌면 내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미래의 한 장면을 예고편처럼 들이밀기 때문일까. 그것은 감정보다 오래 남고, 불쾌함보다 더 깊은 꺼림칙함으로 남는다. 잊히지 않는 불쾌감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인식이었다.
푸트레신, 카다베린. 죽음이 내뿜는 냄새의 화학적 이름들. 하지만 이 냄새가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한 분자의 조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 육신 또한 언젠가 이 냄새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 무의식적인 자각이 먼저 반응한 건지도 모른다. 진화적으로 인간은 같은 종의 사체 냄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감염을 피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본능. 그래서 이 냄새는 단순한 악취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새겨진 경고의 흔적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냄새를 통해 인간과 계급의 경계를 설명한 방식은 절묘했다. 어떤 냄새는 말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증명한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을 지나온 시간이 축적된 결이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지하실의 냄새가 그러했듯, 이 고독한 죽음의 냄새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한 생의 마지막 절규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내 일상적인 공간들 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포개져 있다. 명일동 싱크홀 오토바이 사고 현장, 오산 가장교차로의 구조물 붕괴, 창원 야구장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한 여성의 이야기. 모두 나에게 익숙한 장소이거나 내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였다. 그 길들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단순한 길이 아니다. 평범한 기억 위에, 누군가의 마지막 숨결이 겹쳐진 곳들이다.
사는 건 뭘까. 이런 죽음의 편린들 앞에서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감각 속에서도, 단 하나의 감각만이 뚜렷하게 남았다.
'아직은, 내가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그 명징한 직감이 오늘의 나를 지탱한다.
어쩌면 살아 있다는 건,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고도 자신의 차례가 아님을 확인하며 하루를 더 버텨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냄새는 여전히 코끝에 머물고 있지만, 그것조차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감각할 수 있다는 것, 거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 냄새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삶의 절박함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