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두 번 하더라도, 미리 움직이는 삶
오늘은 식당 마감을 9시 10분에 끝냈다. 정해진 퇴근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가게 문을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 8시 30분부터 주문이 없었으니 사장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마감 준비를 시작했고 덕분에 일찍 나올 수 있었다. 어두운 가게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머리카락과 옷에 밴 기름 냄새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스쳤다. 단순히 일찍 퇴근해서 좋은 것과는 다른,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알아챈 듯한 기분이었다.
원래 나의 근무 시간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였다. 사장님이 근무 시작 시간을 4시 30분으로 당기면서 퇴근도 9시 30분으로 맞춰졌다. 주문 마감은 9시. 시간이 바뀐 후 며칠 지나자 사장님은 대개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먼저 퇴근하셨고, 나 혼자 마감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혼자 마감하다 보니 9시 30분에 딱 맞춰 퇴근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엔 원칙을 지키려 했다. 이십 대 때 에버랜드 식당에서 일하며 매니저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10분 남았다고 고무장갑 먼저 끼지 마. 손님들 계시는데 가라고 하는 거 같잖아."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주문 마감 시간인 9시까지는 조리기구를 그대로 두고, 홀 청소도 9시 이후로 미뤘다. 마지막 주문이 들어오면 깨끗이 닦아놓은 걸 다시 쓰고 씻어야 하는 게 귀찮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내 나름의 바른생활’을 고집했던 거다.
하지만 결과는? 10시 퇴근은 기본이었고, 심하면 10시 30분을 넘겼다. 바쁜 날이면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홀 바닥에는 쓰레기가 흩어져 있고, 테이블은 양념으로 끈적거렸다. "이걸 9시 30분까지 어떻게 다 끝내?" 근무는 30분 일찍 시작하는데 퇴근은 더 늦어지니까, ‘사장님들은 원래 이렇게 해야 돈을 버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월급 160만 원에 초과 수당도 없는데, 늦게까지 일한 대가는 온몸의 피로와 쑤시는 등과 허리뿐이었다.
예전에 사장님과 같이 마감할 때 사장님이 8시 30분부터 조리기구를 씻기 시작하면 나는 속으로 투덜댔다. ‘어차피 주문 들어오면 또 씻어야 하는데, 왜 저렇게 미리 해서 일을 두 번 하게 만들지?’ 그때는 둘이 함께 마감했으니 시간도 넉넉해서 미리 준비하는 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마감하며 늦는 날이 반복될수록, 그 방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8시 30분부터 미리 설거지를 하고, 홀 바닥을 닦고, 조리기구를 정리해 두면 9시 30분에 딱 맞춰 끝낼 수 있었다. 오늘처럼 8시 30분 이후 주문이 없는 날엔 20분이나 일찍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중간에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조리기구를 꺼내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럴 땐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난다.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혼자 마무리를 하니 이 시간대의 새 주문이 반갑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9시까지 기다리는 것보단, 그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게 마감 시간을 훨씬 줄여주었다.
설거지를 두 번 하는 것. 그것을 감수하고자 마음먹는 것. 그건 단순히 식당의 마감 요령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삶의 방식이 겹쳐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미뤄왔던 게 아닐까? "어차피 의도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또다시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시간을 낭비하거나 아예 시도조차 안 한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일하는 식당은 8시 30분 이후로는 홀 손님이 거의 없고, 배달이나 포장 주문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늦게 오시는 손님께는 9시까지 퇴장을 안내하기도 하니,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에버랜드 매니저가 했던 말은 그때의 상황이었고, 지금 여기선 다르다. 미리 움직이는 게 부당하거나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 생각을 앞으로의 삶에 적용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두 가지 실천 방안으로 확장되었다.
첫째, 불확실성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먼저 움직이자.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게 나한테 정말 필요할까?", "내가 시험에 붙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시간만 보내지 말고, 일단 책을 펴자. 새 프로젝트를 앞두고 실패를 걱정하기보다, 단기 계획이라도 세워서 시작하자. 설령 두 번의 수고가 필요하더라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단 낫다.
둘째, 과도한 자의식으로 상황에 끌려다니지 말고 현실을 보고 주도적으로 살아보자. 예전의 나는 늦은 퇴근에 지쳐가며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남들 눈엔 "저 사람은 왜 마감이 저렇게 오래 걸리지?"로 보였을 수도 있다. 문제를 인식하고, 미리 설거지를 시작하고, 청소를 해놓는 작은 변화를 줬을 때, 나는 오늘 20분의 자유를 얻었다. 그 20분은 단순한 남는 시간이 아니었다. 상황에 끌려가는 대신,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다는 작은 증거이자 자신감이었다.
오늘의 20분은 단순한 조기 퇴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설거지를 두 번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고 움직이는 삶. 그것이 불확실한 인생에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아닐까. 앞으로도 나는 기꺼이 설거지를 두 번 하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떻겠냐고, 내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