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맛, 손끝에 남아있던 감각
요 며칠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밥을 해 먹는 일조차 귀찮았고, 설령 요리를 한다 해도 이제 내 레퍼토리는 바닥난 지 오래라, 며칠 전 먹었던 음식이 또 그 음식 같아 입맛도, 요리할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뭘 사 먹자니, 백수가 된 지 네 달이 넘어가면서 돈 쓰는 일에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돈을 쓰면 그만큼의 기쁨이나 새로운 경험이 따라와야 할 텐데, 이 동네에서 그나마 괜찮은 식당 몇 곳을 고르는 게 뻔했다. 세상의 엔트로피가 무질서로만 치닫듯, 자주 가던 식당들도 더 이상 놀라움이나 기쁨을 주기보다는 실망을 안길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괜히 나가서 후회하느니 차라리 집에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가만히 있지도 못했다. 마치 마려운 강아지처럼 방 안을 서성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며칠 전, 문득 내가 야심 차게 만들어둔 냉면 비빔장이 떠올랐다. 때마침 6월 하순, 시원한 냉면이 어울리는 시기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그걸 해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참 아이러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며 이불속에 파묻혀 있던 내가, 갑자기 비빔장을 꺼내 냉면을 만들어 맛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싱크대로 향하고 있었으니.
참고로 이 비빔장은 예전에 내가 식당을 운영할 때, 한 선배에게 전수받은 대용량 레시피를 집에서 소용량으로 변형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 선배는 영등포 백화점에 입점한 유명 냉면집에서 점장으로 일했는데, 사실상 사장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배운 레시피는 내 식당에서 냉면 메뉴를 처음 선보였을 때 꽤 화제가 될 만큼 반응이 좋았다. 내게는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의 성취감, 손님 앞에 자신 있게 내놓았던 자부심이었다.
지금은 식당을 접었기에 사골을 다섯 시간씩 고을 여유는 없어, 온라인에서 구입한 도가니탕을 걸쭉해질 때까지 졸이고, 예전 감각을 더듬어 10분의 1 비율로 양념을 넣어 ‘초간단 비빔장’을 만들었다. 저울도 없이 기억과 입맛에만 의존한 탓에, 처음 만들었을 때는 고춧가루 풋내가 나고 완성도가 살짝 아쉬웠지만, 맛을 보니 예전 그 맛의 90%쯤은 구현해 냈다. 다만 황설탕 대신 스테비아를, 배 대신 배즙 주스를 썼고, 국간장 브랜드도 달라 단짠맛의 결이 미묘하게 달랐다. 어딘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숙성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간이 약이다’라며 며칠을 보냈다. 숙성이라는 이름 아래 묵혀둔 조마조마한 실험. 어쩌면 며칠 전의 나에겐 해보고 싶은 열정이 있었고, 오늘의 나에겐 그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냉면을 삶아 찬물에 바락바락 헹구고, 미리 얼려둔 육수를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갔다 꺼내 대나무 스푼으로 두드려 슬러시 얼음육수를 준비했다. 그릇에 면을 담고 비빔장을 한 스푼 얹었다. 단맛을 조금 더 살리고 싶어 배즙을 약간 추가하고, 식초와 연겨자를 살짝 넣었다. 고명은 마땅한 게 없어 열무김치를 얹었고, 슬러시 육수를 면과 섞었다. ‘차가워져라, 차가워져라.’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양념이 잘 배도록 비벼준 뒤, 젓가락으로 한 입.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래, 이 맛이었다. 손님에게 돈을 받고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았던, 스스로에게 떳떳했던 그 맛.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당기는, 젓가락을 다시 들게 만드는 감칠맛. 순간 가슴 한쪽이 울컥했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뜨겁고 선명한 감정이었다.
그 울컥함의 정체를 곱씹었다. 단순히 맛이 그리웠던 게 아니었다. 내가 쏟아부었던 시간과 노력, 그것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인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 그 일을 사랑했고,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 축적된 감각과 손의 기억이—지금처럼 무기력한 나에게도—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무기력 속에서 가장 두려운 건 내가 아무 능력도 열정도 없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쓸모없다는 비관이 하루에도 몇 번씩 속삭였다. 그런데 냉면 한 그릇이 그걸 반박해 주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어떤 결이 살아 있었고, 내 손은 아직 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내 혀는 그걸 기꺼이 감탄할 줄 알았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나’와 재회한 기분이었다. 마치 이산가족이 수십 년 만에 서로를 껴안는 순간처럼, 내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냉면을 다시 만들어보려는 마음—그 벼랑 끝의 작은 승부욕—은 어쩌면 식당에서 함께 일했던 이모가 경마장에 가는 마음, 대학 동아리 선배가 카지노를 찾는 마음, 내가 매주 로또를 사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내가 옳았다’는 짜릿함, 도파민, 보람과 성취를 기다리며 오늘을 견딘다. 어떤 이는 도박으로, 어떤 이는 종교로, 또 어떤 이는 냉면 한 그릇으로 그것을 얻는다. 오늘의 나는 그게 냉면 한 그릇이었다. 작은 것에도 감동할 수 있는 내 혀와 마음과 손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오늘 하루를 버틴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텅 빈 방의 적막이 다시 나를 덮쳤다. 냉면 한 그릇이 잠시 되살려준 ‘나’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 지난 10년,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식당 문을 닫은 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주저하고 움츠러들 뿐이다. 큰 희생을 치르며 선택했던 길을 그만둔 뒤의 공허함.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허함 속에서도 냉면 한 그릇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식당은 접었지만, 내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내 안의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찾아야 할 건 새로운 식당이 아니라, 그 불씨를 다시 살릴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냉면 한 그릇이 내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내가 완전히 끝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어낼 힘이 남아 있고, 그 힘은 언젠가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
오늘은 냉면 한 그릇으로 충분하다. 내일은, 어쩌면 또 다른 한 그릇의 무언가를 만들어볼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시 걸음을 내디뎌볼 것이다. 비록 느리고 더디더라도, 내 손과 마음이 기억하는 그 결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