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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by Daga

영화 <얼굴> 리뷰: 스포일러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얼굴>의 주요 전개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읽기 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자 ‘맹(盲)’은 ‘눈’을 뜻하는 목(目)과 ‘잃다’를 의미하는 망(亡)이 결합한 글자다. 글자 그대로 ‘눈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뜻하지만,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은 단순히 물리적 시각의 상실을 넘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정작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우리 모두가 진정 ‘눈먼’ 사람은 아닌지 묻는다.

영화는 1970년대라는 척박한 시대를 배경으로 ‘본다’는 행위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과 편견이 미적·가치적 기준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비추며,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다고 믿는지, 그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다.


주인공 정영희의 비극은 그녀의 ‘얼굴’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그녀를 ‘못생겼다’며 손가락질하지만,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실제 정영희의 사진은 우리가 상상했던 괴기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투박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못생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영화는 그것이 외모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평가와 멸시가 덧씌운 낙인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정영희는 1970년대 공장의 열악한 환경—휴식시간도 없이 화장실을 1분 안에 다녀오라는 상사의 터무니없는 지시를 따르다 바지에 용변을 보는 굴욕을 겪고, 유년 시절 어머니의 혹독한 매질과 가출로 인한 배움의 결핍, 어눌한 말투로 인해 손쉬운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녀의 ‘못생김’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가 그녀를 폄하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낙인이었다.


정영희와 임영규의 만남에서, 나는 시각장애인인 임영규가 외모가 아닌 내면의 가치를 볼 줄 아는 인물일 거라는 안일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기대를 무참히 배반한다. 임영규는 정영희가 자신의 도장 기술을 알아봐 주고 주먹밥을 챙겨주는 마음씨에 끌려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놀리려 던진 “아내가 예쁘다”는 거짓 위에 행복과 자존감을 쌓았다.


그는 영화초반 “손이 눈의 역할을 한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정영희의 내면을 손이나 마음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타인의 말로 빚어진 허상이었다. 친구 철규가 던진 “못생겼다”는 한마디에 그의 유리성은 무너지고, 그는 세상과 아내를 향한 증오에 휩싸인다. 이는 그가 평생 벗어나려 했던 비웃음과 멸시를 다시금 느끼게 한 세상, 자신을 기만한 모든 이들, 그리고 그 기만에 침묵한 아내에 대한 분노였다. 임영규는 사회가 강요한 ‘외모’라는 천박한 잣대에 스스로를 가두며, 아내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 또 다른 ‘눈먼’ 사람이 된다. 그의 말—“아름다운 건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해”—는 그가 얼마나 세속적 기준에 얽매였는지를 보여준다. 임영규에게 그 아름다움은 왜 꼭 그 외모여야만 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정영희의 삶은 어둠 속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고독한 촛불을 연상시킨다. 그녀의 불의에 맞서는 방식은 의식적 선택이라기보다, 빛을 품은 존재가 어둠을 외면할 수 없는 본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은 늘 폭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하고 무심코 뱉은 어린아이의 말은 어머니의 매질로, 공장 사장의 성추행을 고발한 외침은 동료들의 저주로 되돌아왔다. 피해자 보호라는 개념이 희미했던 시대, 진실의 폭로는 피해자에게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었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들은 갑작스러운 빛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며 밀어냈고, 빛을 가져온 정영희는 가장 먼저 고립되었다. 정영희의 저항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이나 잘못으로 인한 실패는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충격을 막아줄 안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빚어진 ‘구조적 패배’였다.


영화 <얼굴>의 진짜 질문은 “당신은 무엇으로 세상을 보는가”다. 단순히 ‘본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세계를 구축하고 타인을 판단하는지를 묻는다. 임영규는 타인의 말을, 사회는 외모와 편견을 근거로, 정영희는 눈에 보이는 진실을 근거로 각자의 세계를 살았다. 영화는 이 서로 다른 인식들이 충돌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영희는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던 촛불이었다. 그 빛은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 희미했지만, 스스로를 태우기엔 충분히 선명했다. 그녀의 삶은 진실을 말하는 자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여전히 달콤한 거짓과 자신에게 향할지 모를 위험에는 기꺼이 눈감고 모른척하며, 때론 그러한 불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한다. 그렇게 불편한 진실을 전달하는 이에게는 책임을 전가한 채 거짓된 평안을 유지한다. 노무현을 지키려던 촛불에서 박근혜 탄핵의 광장, 채 상병의 진실을 외치던 박정훈 대령의 고난, 내란 계엄을 막아선 응원봉 불빛까지, 빛은 꺼지지 않으려 애써왔다. 하지만 혐오와 극단주의의 그림자는 진실의 불꽃에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영희의 고독한 촛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에게 지금도 연상호의 영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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