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한국적 자부심의 경계
넷플릭스 글로벌 1위, 빌보드 TOP100 진입, 글로벌 콘텐츠 열풍. 최근 몇 년간 한국 문화의 세계적 성공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쓸고,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를 장악하던 그때와 같은 감정이 지금 ‘케이팝 데몬 헌터스(KDH)’를 향한 열광에도 흐르고 있다. 한국을 배경으로, K팝 걸그룹이 도깨비나 저승사자 같은 데몬들과 싸우는 세계관. OST는 한국 작곡가가 만들었고, 안무와 연출에도 한국 창작자들이 참여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흥행 중이라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한국 문화가 세계를 흔들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환호의 그림자 뒤에서, 어쩐지 불편한 질문을 떨쳐내지 못한다. KDH는 미국 소니가 제작하고, 넷플릭스가 배급하며, 감독 역시 한국계 미국인이다. 법적 권리도 창작의 틀도 모두 미국에 있다. 그러니 냉정히 말해, 이 콘텐츠는 ‘한국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기며, 타인의 모방에는 불쾌감을 표하는 걸까.
과거를 떠올려보자. 한국은 오랫동안 서구 콘텐츠의 주변부였다. 미드 ‘로스트’의 한강대교, 어벤저스의 서울은 늘 어설펐고, 그 속의 한국인은 대사 몇 줄로 스쳐 지나가는 배경 인물이었다. 우리는 늘 제대로 비춰지지 못했다. 그런 왜곡의 시대를 지나, KDH는 마치 처음으로 ‘우리를 정확히 재현해 준 콘텐츠’처럼 보였을 것이다. 한옥마을, 깡통 테이블의 떡볶이와 어묵 반찬, 민화 속 호랑이와 한의사 캐릭터까지. 억지스럽지 않은 묘사와 실제 한국 창작자들의 참여, 무엇보다 잘 만들어진 결과물. 이것은 단순히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 초상’처럼 느껴졌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부심으로 번졌다.
자부심은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부심이 소유의 감각으로 확장될 때다. ‘이건 우리 거다’라는 외침이 ‘남이 따라 하지 말라’는 배타성으로 흘러가는 순간, 우리는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케데헌은 미국 자본과 시스템의 산물이다. 우리가 기여했을지언정, 그 콘텐츠는 한국이 주도한 결과가 아니다. 자부심의 뿌리를 그렇게 착각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불안해진다. 우리가 박수 치는 대상이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중국 팬들의 KDH 커버 영상에 달린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그 불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넷플릭스도 못 보는 데 따라 하냐”, “한국 싫다면서 뒤로는 따라 하네”, “지네 거라고 또 우기겠지.” 나는 그 댓글들에서 분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을 읽는다. 그것은 ‘우리만의 것’이라 믿고 싶은 콘텐츠를 남이 가져가는 듯한 기분에 대한 반사적 반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KDH는 애초에 우리 것이 아니었다. 중국 팬들의 모방도, 한국인들의 자부심도, 그 뿌리는 같다. ‘한국적’이라는 감각이 세계적으로 멋지다고 여겨졌다는 사실. 그 점에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감탄을 함께 나누기보다, 배타적으로 반응하는가. 결국, 그것은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아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KDH가 한국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콘텐츠는 ‘한국적 감각’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증명했다. 도시의 속도감, 최신식과 전통의 공존, 아이돌 시스템의 집약성과 문화적 정서—이 모든 것은 한국 사회의 맥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디테일이다. 우리는 KDH를 통해 한국적 이미지가 단지 낯선 이국적 장식이 아니라, 감정적 서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이건 대단한 일이다. 한국적인 것이 ‘소비’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전 세계에서 동시에. 다만, 우리가 자각해야 할 건 이것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여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쯤에서 일본의 전례가 떠오른다. 버블 시기 일본은 자국 문화의 우월성을 믿었다.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였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전자제품은 세계를 휩쓸었다. 하지만 플라자합의 이후 거품이 꺼지자, 일본은 글로벌 문화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지금도 뛰어난 콘텐츠를 만들지만, 구조적 영향력은 줄었다.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시점에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정말 주도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짜 과제는 ‘주체적 설계’다. 남이 만든 ‘우리 이야기’에 박수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우리가 설계하고, 우리가 주도하고, 우리가 소유하는 플랫폼 위에 우리 이야기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분명 ‘소비’의 영역에서는 성공하고 있지만, ‘생산’과 ‘유통’의 구조에서는 여전히 글로벌 자본에 종속돼 있다. BTS와 오징어게임이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재생산 가능한 모델이 되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자부심은 출발점이다. 하지만 자각 없이는 그것이 방향이 될 수 없다. 케데헌은 지금까지의 한국 문화가 쌓아온 자산이 세계 무대에서 어떤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통해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세계에 ‘인정받고’ 싶은가, 아니면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가. 전자는 케데헌이 말해준다. 후자는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야 할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