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날 수영을 위한 플레이 리스트를 정리한다. '수영을 하는데 웬 플레이 리스트?' 주변 사람들에게 수영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의문스러운 눈으로 반문한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각을 선사한다. '방수 골전도 이어폰'으로 이름 붙여진 자그마한 이어폰을 통해 느끼게 된 감각의 전과 후로 나의 수영 생활은 나누어진다 해도 무방하다.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전달되는 소리의 진동이 마치 물속에 오직 나와 음악만이 부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나의 플레이 리스트를 죽- 훑는다. 클래식과 어딘지 빛이 바랜듯한 음악이 대부분인 이 리스트를 보면, 마치 '결단코 숨이 차지 않겠다'라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선율에 맞춰 6비트 킥을 찬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도입부처럼 묵직하게 물을 밀고 나간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호른 연주자와 호흡 싸움을 하며 잠영을 이어간다. 가장 속력이 나는 구간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들을 때. 마왕이 쫓아오고 있다 상상하며 속력을 내는 순간 짜릿해진다. 때로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같은 가사에 감격하며 물질을 한다. 이렇게 어떤 날은 조용필을,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유재하와 Nat king cole을 들으며 헤엄치는 날들이 이어진다. 이런 나의 조용한 우주 같은 플레이 리스트에 격변이 일어난 날이 있었다. 그 시작은 어딘가 잠들어 있던 학창 시절의 MP3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그 물건이 여전히 작동되는 사실에 놀라기를 한 번, 그리고 그 속에 든 리스트의 현란함에 또 한 번 놀랐던 순간이었다. 그 향취를 어디서 다시 느껴볼까 짧은 고민을 하다, 최근의 내가 가장 애용하고 있는 음악감상실인 수면 아래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준비 운동을 하며 전원을 켜자 아시아의 별, 보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갑자기 '저 먼바다 끝에 뭐가 있을'지 헤엄을 쳐 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구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의 미친 템포에 맞춰 킥을 찬다. '운동요', '노동요'에 콧방귀를 뀌던 모습이 무색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빠밤밤빠바바바 빠밤밤빠빠바바' 하며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온다. 2NE1(투에니원)의 <내가 제일 잘나가>다. 마치 잊고 지냈던 그리운 친구를 만난듯한 감정이 밀려온다. 생의 거지 같음에 위로를 던져주던 그 곡의 전주를 듣는 순간,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접영, 지금 이 순간은 접영이다. 요령 없이 세상에 부딪혀 가던 그때를 위로해 주던 노래는 또다시 이 지난한 과정 속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가 제일 잘나가' 마음 속으로 최면을 걸며 나아가 본다.
언제쯤이었을까. 사람이 자아낸 말의 무게에 압도당하고. 체념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스스로 만들어 낸 그 체념의 압박에 그만 백기를 들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살겠다 다짐했던 것은 또 언제쯤이었을까. 조용한 곡을 배경 삼아 무해하고, 아름답게 살겠다, 그러니 건들지 말아 달라 내비치던 나는 미숙함이라는 무기로 세상을 헤쳐나가던 시기의 열정을 들추어 본다. 과거의 시간 속에 가둬 둔 내가 기억의 저편에 서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편견의 벽을 하늘 높이 쌓은 채로 정제된 소리만을 듣고자 했다. 파편 같은 말들과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했던 많은 것을 거름과 동시에 나만의 생각 속에서 잠식되어갔다. 종잇장 같은 얄팍한 트릭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던 시간들이었다. 평안한 삶이 주는 충일감으로 포장된 삶의 크고 작은 체념들의 수를 헤아려 본다. 인간의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 위에 세워진 안온함이란 얼마나 위태로운가. 돌아보면 나는 오래된 나의 플레이 리스트에 존재하던 시끌벅적한 그 노래들과 함께 그 시절의 온전치 못한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인지하지 못한 기만이 내 좁고 옹졸한 만성의 틀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어서 찌질했던 과거의 내가 달가운 침범을 해온다. BPM 130 이상의 템포로. 피아를 식별한 나는 나의 마음속에 외친다. "사격 중지. 아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