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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배기 흰 망아지의 기쁨

by 도시골사람






지잉. 짧은 진동이 느껴져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수영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들의 단체 톡방에 링크가 하나 올라와 있다. 그 뒤를 이어 "이거 ** 아냐?", "완전 **인데? 하하" 하는 글들이 이어 따라붙는다. 뭐가 나라는 말일까. 궁금해져 링크로 접속해 보니 '수영장 에겐녀'라는 제목과 함께 매일 수영복이 바뀌고, 화려한 무늬의 수영복을 좋아하며, 수영장의 모든 소식을 알고 있다는 사랑스러운 일러스트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에겐녀(에스트로겐 호르몬이 넘치는 여성스러운 여성), 테토너(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남성스러운 여성)'이라는 말과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라는 말 자체에 차별이 만연해 있다고 느끼는 프로불편러인 나에게는 그다지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뭇 진지한 칭찬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에 'ㅎㅎ 그런가요'라고 메시지를 보내고서 휴대폰을 내려둔다. 그러다 개운치 못한 마음이 들어 하던 일을 깨끗이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나는 1990년생 백말 띠(문법상 '백마 띠'가 맞으나, 익히 백말 띠라고 불러왔으므로 백말 띠라 서술하겠다)다. 그것도 1990년의 정월에 잉태되어 그해 11월에 태어난 '진짜배기' 백말 띠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어느 곳에서나 내가 '진짜배기 백말 띠'라는 이야기를 하며 대화 상대들의 아들자식보다 자신의 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릴 적 나는 이 '진짜배기 백말 띠'라는 수식어가 내 앞에 붙는 사실이 무척 싫었다. 꼭 한 번은 "가쓰나가 백말 띠라 어디다 써, 팔자나 사납지."라는 말을 듣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죄스럽게 만드는 그 말이 언제나 마음에 남아 나를 할퀴곤 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재학 중인 학년이 그 아래, 위 학년들보다 항상 적게는 한 반, 많게는 두 반 정도 인원이 적었다. 드센 팔자를 타고날 자식의 탄생에 지레 겁을 먹은 부모들이 1990년을 피해 임신과 출산을 했기에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늘 인원이 적어 학교 행사마다 깍두기 역할을 맡았던 90년 생으로서 최근에 만연한 푸른 뱀띠, 푸른 용띠, 검은 토끼의 띠, 황금 돼지 띠라며 온갖 색상을 띤 동물을 양산시키며 출산 프로모션을 해대는 세태에 코웃음이 난다. 언제는 색깔 있는 동물이 팔자가 사나워 나쁘다더니, 이제는 기세가 좋고 복이 따른단다.

어디 인원만 적었을까. 또래 친구들에 비해 키가 컸던 나는 항상 여학생 줄의 제일 끝에 서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의 손을 잡은 짝꿍(담임선생님 피셜 마지막 여학생과 짝꿍을 하게 된 '운 좋은 남학생')과 나의 뒤로 줄줄이 남&남 짝꿍이 줄을 이뤘다. 당시엔 그저 '남자 친구들이 많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는 인구조사가 시작된 1970년 이후 성비가 최고치에 달했던 1990년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1990년의 성비는 여아 100명 당 남아 116.5명으로 자연 성비가 100:105인 점을 고려했을 때 기괴할 정도로 치우쳐 있다. 당시 지역별 성비 격차 중 높은 순위를 차지했던 곳으로 1위 경북 130.7명, 2위 대구 129.7명, 3위 경남 124.7명의 수치를 보면 영남지역에서 특히 성비의 불균형이 극심한 점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딸을 낳은 나의 엄마는 당시 아이를 낳은 후 몸조리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남의 집에 시집을 왔으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지."라는<사랑과 전쟁> 대사로 나올 법한 말을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91년에 연이어 임신이 된 아이를 '연년생은 같은 성별일 확률이 높다.'는 할머니와 동네 사람들의 말에 '또 딸을 낳지 않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임신 중절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93년 쌍둥이를 임신한 엄마는 최신식 의료 기계로 초음파 분석을 해준다는 병원을 찾아 대구로 여정을 떠났다. 그곳에서 의사로부터 '둘 중 하나는 확실히 꼬추가 있다'라는 감식 결과를 받고 안심하며 당시 금액으로 1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엄마는 "아들 새끼 다 필요 없다"라는 말을 잊을만하면 하시며 아들밖에 없어서 박복할 내 팔자를 걱정하신다. 그럴 때마다 불과 30여년 만에 달라진 인식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몰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들이 있다. 대체로 '첫 딸은 살림 밑천', '시집가서 친정 욕보이지 않게 어릴 때부터 잘 배워야 한다.', '딸이 너무 잘나면 아들 기를 죽인다'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 말들로 인해 나의 귀에 못이 박힌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귀가 아닌 마음에 박힌 못이 되어 끝없이 변주해가며 여전히 마음속을 떠돌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이 같은 말을 차별의 말, 희롱의 말이라 되받아 넘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에 미처 다 쓸어내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990년, 기괴한 성비의 지역인 영남에서 당시 혼전이었던(부모님은 결혼식 날짜를 잡은 후, 내가 생겼다고 하지만 글쎄) 24살 동갑내기 연인에게 찾아온 백말 띠 여자아이인 내가 박약한 논리에 사그라지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것에대해 슬프게도 '운이 좋았다'는 상투적 표현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보인다.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는 바이올린 한 대에 얽힌 600년간의 악의 연대기를 서술한 소설이다. 작가는 주인공 아드리아라는 인물을 통해 '악의 경험을 증언하는 일로써 예술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인류 역사 이래에 존재한 독재의 그늘 아래 무수히 많은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누군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일들을 문학, 영화, 미술, 음악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사상의 독재 아래에서 자신의 폐로 숨을 쉬어본 적 없는 동갑내기의 1할을 태중에서 잃으며 태어난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의 의미를 가지게 된 90년 생 여자아이인 나는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 것일까.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 지금, 우선은 잘 살아 보기로 했다. '진짜배기 백말 띠 가시나'가 얼마나 잘 사는지 몸소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백말 띠의 딸이 거친 인생을 살 것이 염려되어(무엇이 염려된 것일까? 딸이? 아니면 팔자 드센 딸을 둔 자신들의 인생이?) 놓아버린 손들에 그들이 원하고 칭찬해 마지않는 모양새처럼 이토록 곱게, 이토록 '에겐녀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차별과 희롱이 장마철 발 바닥에 들러붙는 바닥처럼 만연했던 1990년에 태어난 진짜배기 백말 띠 가시나의 팔자가 그대들의 염려와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온 영남 지방을 떠돌며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의 내가 가진 '에겐녀스러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한 나의 결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내 태도와 취향임을 알기에 타인의 기꺼운 곡해를 즐겨야지.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악이 비록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지라도 그 명백한 악에 맞서 증언하며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문득 사명처럼 다가온다. 내 삶의 1할쯤이 문화의 관성에서 비롯된 악에 맞서는 것이라 이름 짓자 마음속 깊은 곳에 둔 난잡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삶의 의미'라는 바구니에 조금은 그럴듯한 것이 하나 담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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