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거리두기
“나 너희 집 왔다.” 엄마의 전화는 늘 예고 없이 왔다. 내가 외출 중이든, 약속이 있든 상관없었다. 그럴 땐 지인들과 있다가도 “엄마 왔어!” 하며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달려갔다.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당황스럽고 가끔은 불편했다. 그래서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나 지금 밖인데… 오늘 점심 약속은 미리 잡힌 거였어. 앞으론 미리 얘기해 주면 좋겠어.” 엄마는 말없이 “그래,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날 약속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잘 들어가셨어요? 괜히 헛걸음하셨네…”
엄마는 말했다.
“응, 잘 들어왔어. 빵 하나 사서 버스 정류장에서 쓸쓸하게 먹었어.”
그 말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쓸쓸하게’에 이상하게 힘을 주는 엄마 특유의 말버릇.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닌데 괜히 찔리게 만드는 그 말투. 이전 같았으면 “엄마 미안해, 내일 다시 밥 먹자” 하고 얼른 말했을 거다. 미안함, 죄책감, 급한 회복 시도. 그게 내 자동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엄마 말에 죄책감보다 먼저 든 건— ‘귀엽다’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그렇게 반응할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던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바로 휘둘리지 않았다.
엄마와 나 사이에 작은 선 하나를 그을 수 있었다. 감정을 밀어내지도, 붙잡지도 않으면서— 그 말을 말 그대로 듣고, 그 감정을 감정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 그 거리 안에서 엄마도, 나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