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흐르기 시작하고
며칠째, 딸은 말이 없고 남편은 툭툭 짧은 말만 던졌다. 아들은 퇴근하자 옷을 세탁소에 맡겨달란다. 나는 그걸 또 해준다.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딸은 말한다. “엄마, 오전에 등기 온대.” 나는 외출을 미루고 집에 남는다. 주말이면 집안 어른들 병원에 같이 간다. 예약부터 동행까지—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또 내가 한다.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백수가 과로사한다.” 맞다. 이게 바로 나다. 직장을 안 나간다고 여유로운 게 아니다. 나는 가족 모두의 일정을 맞추며 살고 있다. 감정까지 포함해서.
요즘은 내 기분도 잘 모르겠다. 무덤덤한 건지, 쌓인 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어”라며 넘겨온 시간들. 근데 가끔은 눈물이 새고, 가끔은 짜증이 튀어나온다. 예전 같았으면 꾹 눌렀을 텐데,
요즘은 그게 잘 안된다.
식탁에 앉아 생각했다. ‘이 집에서 내 자리는 뭐지?’ 밥하고, 듣고, 맞춰주고, 받아주는 사람. 그 역할을 너무 오래 해왔다. 지쳤다. 그래서 조용히,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요즘 좀 힘들다.”
그날 밤, 오랜만에 울었다. 누가 위로해 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내 감정을 내가 책임지는 연습’을 해본 날. 돌아보면, 나는 늘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살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고, 받아줘야 한다고, 내가 조용히 넘겨야 가족이 덜 싸운다고 믿었다. 근데 이젠— 나도 힘든 날엔 힘들다고 말하고 싶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그거, 딸로서도 아내로서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