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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직장이란?

by 고인물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당신에게 직장이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가장 이상적인 대답은 '자아실현'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과연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수가 소수일 거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수단'이라는 의미의 답변이 가장 많지 않을까 합니다. 아주 현실적인 답변이죠.

학창 시절 우리는 사회생활에 이상적인 목표를 부여하지만, 결국 대다수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직장을 선택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포함해, 직장을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지금의 MZ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시대에는 이런 상황이 바뀔까요?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마 지금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예상을 해봅니다. 제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산업의 발전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사회가 그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안쓰러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처음 취업을 준비할 때를 생각해보면, 그저 월급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이력서를 쓸 때는 제가 원하는 분야와 희망 연봉을 고려해서 지원했지만, 서류 전형 통과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면접을 보아도 계속 떨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원하던 분야와 연봉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은 건 그저 '취업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죠. 그런 마음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원하던 산업으로의 진로를 포기하고, 연봉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물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몇 군데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자존심'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아무튼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20년 넘게 다닌 지금의 회사는 정말 아주 간단한 이유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였지요. 좋게 말하면 직주근접이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분야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생소한 분야였지만 '설계' 업무를 한다는 것과 집에서 가깝다는 점에 만족했습니다. 연봉이요? 사실 그 당시 어디를 가든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수준이었고, 더 많은 연봉을 제안하며 합격을 통보한 곳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회사를 선택한 것은, 분야는 생소해도 '설계'라는 일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려던 산업은 아니었지만, 설계라는 직업에 몸담을 수 있었고 연봉도 당시 중소기업의 평균 수준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시는 무언가에 쫓기듯 취업했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꿈꾸던 졸업 후의 모습과는 한 걸음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직장은 한마디로 '어떻게든 가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꿈도, 목적도 없이 그저 도달해야만 하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가야만 했던 곳이지만 나름 적응은 잘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남들보다 빠르게 진급하기도 했죠. 당시에는 정말 말 그대로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설계를 실제로 하게 되었고, 막히는 것도 많고 맨땅에 헤딩하는 일도 수없이 많았지만 주변의 많은 도움 덕분에 일의 재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재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보통 설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정해진 틀에서 큰 변화가 없거든요. 그런데 제 경우에는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시스템 설계이다 보니 자유도가 꽤 높았습니다. 설계의 기본적인 양식은 맞추되, 정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작업이었죠. 그래서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상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물론 그 과정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려보기도 했고, 대인 관계가 두려워진 적도 있었으며,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의 끈끈함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당시 몇 안 되던 동료들과는 사이가 무척 좋았습니다. 서로 "으쌰으쌰"하며 위해주고, 함께 고생하고 함께 기뻐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의 직장 생활 첫 10년은 '재미'였습니다. 돈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너무 바빠서 돈 쓸 시간도 없었고, 돈을 못 쓰니 아무리 적게 벌어도 돈이 모일 수밖에 없었죠. 어느 날 통장 잔고를 보며 '이게 다 내가 번 돈이란 말이야?' 하고 놀랄 정도로 돈이 모여 있으니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너무 바빠서 불만을 가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제 인생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그 이후의 직장 생활은 저에게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설계가 아닌 관리 영역으로 직무가 완전히 바뀌었거든요. 직무가 바뀐다는 건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아주 큰 이유가 됩니다. 저 역시 당시 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도 국내 도입 초기 분야였기에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었죠. 도입 초기에 성과가 없으면 아예 사라지는 산업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잘못하면 경력과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살아남는다면, 국내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오랜 경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이런 계산까지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중에서 그나마 재미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설계를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제가 해오던 설계와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까지의 결과로만 본다면 꽤 성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확장되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제 경력은 꽤 독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나름의 재미는 있었지만, 그건 일 자체에 대한 재미라기보다는 과거에 함께 설계했던 좋은 사람들과 다른 업무를 함께하면서 생기는 즐거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일 자체에서 순수한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 보니 늘 이직과 퇴사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은 재미없는데 막상 몰입해서 하다 보니 성과가 좋았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저를 더 인정해주었죠. 사회 초년기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일은 잘하는데 일하기는 싫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주변에서는 그 일을 계속 맡깁니다. 그렇다고 잘하는 일을 그만두기도 애매했습니다. 남들이 2~3시간 걸릴 일을 1시간도 안 되어 처리할 수 있으니 시간적 여유도 많았고요. 그런데도 하기는 싫었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또 1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회사를 '발판'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제가 이런 선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20년은 이 일을 더 해야 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데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뒤면 60대인데 그때까지 이렇게 산다고?'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사를 발판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일단 회사 업무는 충실히 합니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제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는 회사 일에 100%를 쏟았다면, 지금은 70%, 50%로 점차 그 비중을 줄여나가는 거죠. 물론 회사 업무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시간과 에너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든 해봤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니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되더군요. 그리고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예전에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도 가능해졌습니다.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못할 일이 없는 시대가 된 거죠.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좋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저에게 직장의 의미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잘할 수 있을 때까지 저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보험'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 보험의 혜택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처럼 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저에게 직장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떻게든 도달해야 하는 곳'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작은 미약했지만 지금까지의 변화는 너무나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요? 과연 '다음'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저는 직장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꿈꿀 수 있으니까요.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당신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직장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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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