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라는 직함을 달고 살게 되면서 주말이나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특히 주말은 성수기인데, 비가 오거나 극한의 추위나 더위로 외출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초! 극성수기이다. 하루 세끼를 다른 메뉴로 구성하여 준비하고, 일주일치의 장을 보고, 그것을 정리해서 또 요리하고 하는 일의 반복. 그럼에도 주말을 기다리는 것은 남편이 함께 있기에 커피 한잔하며 어른과의 대화도 가능하고,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라도 외출을 하여 집이라는 직장을 벗어나 숨 돌릴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은 달랐다. 어쩐지 목요일, 술을 가득 마시고 와서부터 말이 없더라니. 원래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면 그가 먼저 시작하는 대화는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 금요일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사실은 회사에서 변화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약간의 힌트를 내주었다. 그렇게 툭 던져주고 그는 그만의 동굴에 들어갔다. 함께하는 주말만 바라보고 있었던 나에게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지나간 연애들은 참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나를 성장시켜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버거웠던 연애는 기다림, 특히 '동굴에 들어간 자에 대한 기다림'의 능력치를 최고등급으로 레벨 업해주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핸드폰을 끄고 이삼일간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자를 상대하고 나니, 잠깐의 공백 따위 소소하게 여기고 넘어갈 수 있는 내성 혹은 여력이 생겼다고나 할까.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늘었으니 다행이다. 물론 내 딸이 그런 연애를 한다고 하면 정말 뜯어말리겠지만 말이다. 하긴 누군가에게 제대로 홀려 있다면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귀 막고 직진하겠지. 쯧.
그는 꼬박 이틀을 안방 침대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그래도 다행히 밥은 꼬박꼬박 먹으러 나오길래 일부러 다채로운 식사를 준비해줬다. 마음은 버거워도 속은 든든하라고. 회사생활을 안 해본 나로서는 딱히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가 말하지 않는데 굳이 캐물어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지만, 회사에 있는 날인 것처럼 여기고 몸도 머리도 쉬게 내버려 두었다. 정말 신기하게 잠을 자고 자고 또 자는 그가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곁에 잠시 누워서 아는 척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마저도 가장의 무게감으로 다가올까 싶어 들어가지도 않았다.
어제저녁 식사 때, 와인을 한병 냉장고에서 꺼내오길래 드디어 동굴 문을 열고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런 아이템은 어떻냐고 갑자기 사업 구상을 내놓았다. 회사생활 길어야 10년일 텐데, 뭐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틀의 결론이냐고 묻고는 현실에 부합하는 면과 아닌 면을 짚어보며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사실 그와 결혼했을 때부터 "뭐하고 살지?"는 수시로 듣는 말이었어서 그게 당신이 미는 유행어냐고 놀리고는 했었다. 이제 그는 그 고민을 현실에 녹여내고 있었고, 30대의 우리가 웃으며 주고받던 그것이 갑자기 40대의 현실이 되어 피부로 느껴져 나 역시 마음에 커다란 돌이 하나 얹히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회사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응원하며 조용히 기도했다. 오늘 하루, 오직 그의 마음이 평안하도록 지켜주시기를. 평균수명까지 40년은 남은 것 같은데(끄악!!)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살아갈지 여전히 갈피는 잡히지 않는다. 둘 다 비빌 언덕은 없고, 타고난 재능이 뭐라도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 나이까지 찾지 못한 것을 보면 영 없는 것 같고... 일단은 오늘 뭐 '해 먹고' 살 지부터 고민해야겠다. 둘이 함께 한잔하며 신소리 해대다 보면 그래도 뭐라도 걸리지 않을까? 비록 파란 웃음만 남더라도 일단은 만족하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