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dsommar Oct 04. 2021

스웨덴 가요계의 즐라탄, 다린

행복을 찾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알고 있으시죠?


사실 저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서 즐라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만, 처음 이름만 들었을 때는 스웨덴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편견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카린 비요르크홀름"과 같은 이름이 듣기 힘든 것처럼 흔치 않다는 정도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부모님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출신이라고 하는데요,

즐라탄 본인은 제가 요즘 꾸준히 리뷰하고 있는 드라마 <The Bridge>의 주요 장소인 말뫼 출신이라고 하네요.


즐라탄은 40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박지성이나 손흥민 선수처럼 스웨덴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같은 인물입니다.

비록 스웨덴 원주민 출신은 아니지만, 즐라탄 본인의 정체성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스웨덴이라고 하네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스포츠계의 이민계열 스타라면,

가요계에는 다린(Darin Zanyar)이 있습니다.

다린. 출처: 다린 공식 홈페이지

스톡홀름 출신의 다린은 이라크 계열의 혈통(?)을 두고 있는 싱어송 라이터인데요,


우리나라 슈퍼스타K, 프로듀스 등과 유사한 프로그램인 TV4의 <아이돌>을 통해 2004년 데뷔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여러 앨범을 발표하며 스웨덴에서 가장 사랑받는 가수 중 하나로 확실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즐라탄과 다린 모두 조상이 이민자 출신이고, 축구와 가요라는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둘은 스웨덴에서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다린은 2021년 "Can`t stay away"를 발표하기 이전까지, 거의 모든 곡을 스웨덴어로 발표했는데요,


확고하게 본인의 정체성을 스웨덴이라고 말했던 즐라탄과는 달리, 다린의 경우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었음을 익스프레센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가 느꼈던 혼란은 2018년 발표한 곡인 <아이덴티티리스>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이 노래를 "길을 잃어버리고,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에 관한 노래"라고 말하며, 그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지내면서도 한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속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썼지만, 스웨덴에서도  명시적 인종차별은 드물지만 암암리(?)에 "스칸디나비아인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관련 포스팅 1. 슬기로운 경찰생활, Tunna Blå Linjen(1)

- 관련 포스팅 2. 북유럽 전형적 이미지와 현실,Snöänglar (1)


그래서일까요?


다린은 밝은 분위기의 노래를 부를 때도 멋있지만, 개인적으로 아래의 <Göteborg>와 <En säng av rosor> 같이 발라드 노래를 부를 때 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다린은 또다른 소수자이기도 합니다.


2020년 그는 프라이드 위크에서 게이임을 밝혔습니다.


인스타그램에 "모든 사람들은 자존감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걸렸지만, 저는 게이임이 자랑스럽습니다. 행복한 프라이드 위크!"라는 내용을 업로드하며 커밍아웃을 한 것이죠.


이민자 출신과 성소수자까지, 다린이 가졌을 정체성 혼란은 당사자가 아닌 제가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컸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래를 통해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풀어내면서 조금 더 성숙해지고,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다린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이민자 출신은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다문화2세 또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또한 한국에서 아직까지 수용성이 낮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열려 있을 때,

조금 다르다고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같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우리의 세상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질 때, 우리 사회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웨덴 가요계의 이단아, 돌리 스타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