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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튼 공사 첫 번째 날

64일 다이어리

by 패미로얄

<Day 9> 9월 29일


아빠의 얼굴이 마냥 밝지 않으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췌장암 말기로 투병하고 계시는 고모가 오늘 호스피스로 들어가셨다는 연락을 받으셨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시는 고모와 외롭게 어머니 옆을 지키는 조카가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셨다. 고모를 위해서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기에 멀리서 안타깝게 눈물만 흘리고 계신다. 전화통화로 동생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지만 그나마 잘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계속 통화도 거부하고 계신다. 한국으로 다시 보내드려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된다.

"아빠. 우리는 가족이잖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위로해요."

라고 말씀 드렸지만 당신의 무거운 마음이 우리를 힘들게 할까 봐 계속 방에서 혼자 울고 계신다. 이런 우리의 속도 모르고 이승의 가을하늘과 단풍은 얄밉게 아름답기만 하다.


몇 주 전 에드먼튼으로 이사 간 막내딸 친구가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오늘 우리 공주님들의 미션은 집안 문들을 깨끗이 페인트 칠 하는 것이다. 10개의 크고 작은 문들이 있지만 오늘의 목표는 5개의 방화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 Rona에 가서 사 온 페인트 도구들을 정렬해 놓고 우리들의 프로젝트를 시작해 본다. 우리 집의 첫인상을 좌우할 대문의 색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색상표를 보고 약간 밝은 보랏빛이 도는 페인트를 선택했다. 분명 연보라 빛을 선택했건만 신기하게 빛의 밝기에 따라 다른 색이 비췬다. 밝은 조명아래에서는 하얀색을, 그리고 노란빛이 나는 조명 아래에서는 부드러운 보랏빛이 나는 문이 되었다. 페인트를 칠하며 아이들도 신기한가 보다. 같은 색깔도 빛의 색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발현이 되는데 내가 어느 빛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상대가 다르게 보이는 건 당연한 것 같다. 갑자기 주책맞게 감상에 젖어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빛의 눈을 가진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붓놀림이 제법 꼼꼼하더니 세 번째 문에서부터는 쒹쒹 숨소리와 함께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소리가 줄어들고, 여기저기 테이핑 밖으로 페인트가 삐저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힘들고 지처 가고 있다는 신호다. 아이들은 쉬지도 않고 4개의 문을 완성했다. 참 대견하다. 페인트 작업을 우습게 봤다가는 큰코다칠 뻔했다. 침착하고 꼼꼼하며 인내심 있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인 것 같다.

'이 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짧은 기도와 함께 목표보다 1개가 모자라는 성과지만 큰 포옹과 칭찬 그리고 포상으로 파파이스 치킨과 버블티를 선물로 주었다. 게다가 오늘 저녁 슬립오버는 보너스 선물이다.




아이들이 페인트 작업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물을 구입하느라 점심식사가 늦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집에서 싸 온 집반찬과 안타깝게 설익은 밥으로 일단 허기진 배를 달래 본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팀홀튼 아이스카푸치노는 하루에 딱! 한잔만 사드리도록! 할아버지가 아무리 꼬셔도 한잔 이상 드시면 몸에 안 좋아"라고 아이들과 신랑에게 잘 일러뒀건만 아이스캡(아이스카푸치노)을 좋아하는 신랑은 절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남자들끼리 나가면 늘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캡이라니... 팀홀튼 홍보대사가 따로 없다.

"한국에서 먹는 아이스캡은 이맛이 아니라니까! 이상하지, 맛이 달라. 역시 아이스캡은 캐나다에서 먹는 게 최고네!" 딸의 속도 모르고 좋아라 하신다.

별로 차린 것도 없는 밥상인데, 게다가 밥도 설익었는데 아빠는 모든 순간이 다 감사하고 행복하신가 보다.

"이렇게 같이 밥을 먹으니 엄청 좋고 맛있네!"

아, 제대로 갖춰진 밥상이 아니기에 오늘 저녁에는 꼭 식당에 가서 맛있는 걸 대접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두둥! 드디어 공사 시작이다. 우리는 마음의 준비도 되었고, 공구도 준비되었다. 그리고 언제든 검색할 수 있도록 핸드폰도 준비되었다.

제일 먼저 신랑이 가장 걱정했던 화장실 변기부터 수리하기로 했다.

멀쩡한 변기를 뜯어놓고 래미네이트 바닥을 엉망으로 깔아놓아 변기가 고정되지 못하고 붕 떠있는 상태였다. 로나에서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제대로 된 부품들을 사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순전히 내 생각이다) 휘리릭 화장실 변기 설치가 완료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최종 변기물까지 내려보았는데 한 방울도 넘치지 않고 시원하게 잘 내려가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장 큰 숙제를 해결한 것 같다며 환하게 웃는 신랑얼굴에서 이제야 여유가 보인다.




오늘의 프로젝트는 방화문 페인트와 변기 설치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저녁 7시쯤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에드먼튼 대학 기숙사에 들려 큰딸아이를 픽업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한식당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노동 후에는 역시 짜장면이다! 7년 전 에드먼튼에는 한식당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유명한 곳이라고 모시고 간 식당에서 처음으로 드셨던 짜장면은 최악의 맛있었다. 웬만하면 음식 맛없다는 말씀 안 하시고 절대 음식도 남기지 않으시는 분인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그냥 나오셨다는 전설이 아직도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들려온다. "캐나다 짜장면 정말 맛없어!" 오늘은 아빠의 그 기억에서 에드먼튼 짜장면의 오명을 벗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다행이다!




막 음식이 나오자마자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수표가 잘못돼서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정지시켰다는 통보였다. 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이놈의 보험회사는 정말 보험금 받을 때까지 사람 맘고생을 그렇게 시키더니 돈을 받고도 피를 말린다. 나와 신랑이 둘이 함께 은행을 방문해야 해결되는 일이라고 한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어려움은 언제 끝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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