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20> 10월 10일
아빠가 오신 지 벌써 20일이 되었다. 오신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신 것 같다. 몸도 힘드셨겠지만 엄마의 요로결석 검사결과가 별로 좋지 않아서 마음도 편치 않으시다. 결석이 깨졌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어젯밤에는 결석이 움직이고 있는지 엄마가 통증이 시작되셔서 진통제를 드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 없이 깨끗하게 돌이 깨져서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으나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25년 넘게 굳어져온 돌이라 아마 레이저 만으로는 쉽게 제거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아침이다.
어젯밤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아마도 눈이 내리기 전 마지막 가을비가 될 것 같다. 혹시나 어제 해놓은 시멘트 작업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을 했건만 아빠 말씀대로 괜한 걱정이었다.
시멘트를 끝내고 분명 신랑과 아빠는 "이제 끝이다!"라고 하셨는데 오늘 마지막으로 방수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두 분이 생각하는 '끝'과 내가 생각하는 '끝'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방수작업으로 벽 보수공사가 끝나는 건 맞겠지?
뒷마당에서 수확해 온 사과가 아직 많이 남아있어 오늘은 남은 사과로 두 번째 깍두기를 담기로 했다. 사실 꾀 큼직하게 익은 사과지만 시중에 파는 사과처럼 달고 맛있지는 않다. 이 많은 사과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검색해 본 것이 바로 사과김치였다. 이렇게 우리는 무모하고 용감하게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하고 담가보지도 못했던 사과 김치를 담았다. 그것도 자그마치 4리터나 되는 통으로 말이다. 갓 담가낸 사과김치맛은 제목 그대로 시큼한 사과에 김치양념을 묻혀놓은 듯한 따로 노는 맛이지만 양념에 사과육질에 베이고 숙성하게 되면 기대이상의 맛이 나올 것 같다. 페이스북 스토리에 사진을 올렸더니 외국 친구들의 관심문자가 줄줄이 이어진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맛이므로 내년에 조금씩 나눠주는 걸로~
정말 마지막 작업이기를 바라며 방수자재를 사러 캐네디언 타이어에 갔다. 그런데! 제품이 품절되었단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아빠와 난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진 체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실 안팎을 배회했다. 아빠는 어떻게든 일거리를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신다며 놀고 있는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셨다.
날이 너무 좋다.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예쁜 풍경이 절정을 이루고 있고, 햇빛도 이렇게나 따사로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시다는 게 속상했다.
때로는 멍 때리며 앉아 계셔도 괜찮은데... 이렇게 좋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으셔도 괜찮은데 말이다.
밴쿠버에 아흔을 훌쩍 넘기신 고모할머니가 계신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두 분을 꼭 만나게 해드리고 싶은데 같은 캐나다라고 해도 밴쿠버까지 가는 계획을 잡는 게 마치 해외여행 계획하는 것만큼 힘든 건 왜일까?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할지 생각이 복잡하다. 아마도 아직 에드먼튼 공사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기에 약속을 드릴 수가 없다.
레슨을 하는 동안 아빠는 겨울 전 마지막 잔디를 깎으셨다. 창문으로 풍기는 짙은 풀냄새가 참 좋다.
밤 10시 30분
핸드폰에 알림 문자가 왔다. '오로라 관측 가능 95%'
이번엔 절대 그냥 보낼 수 없다! 알림을 확인하는 즉시 빛의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엄청나게 큰 오로라가 우리 집 전체를 덮고 있었다. 앞마당 주차장에서도, 뒷마당 데크에서도 화려한 오로라 향연이 펼쳐졌다. 선배 언니가 캐나다에 놀러 와서 오로라를 처음 본 순간 "하나님! 맙소사!"를 연발했다고 하시더니 정말 쩍 버러 진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순간이었다. 이 멋진 풍경을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이시는 아빠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빠 보니 추운 알버타 시골마을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늘저녁 아빠의 마지막 인사말은 "오늘도 재미있었다"가 아니라 "좋은 선물 받았다!"였다.
예쁜 선물 감사합니다 하나님.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