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32> 10월 22일
아빠는 어제부터 불안하고 정신없고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집보험 때문이다.
✔️사고가 있었던 집은 보험 가입이 안된다.
✔️세입자가 없으면 보험가입이 안된다.
✔️랜트하우스만 따로 보험가입이 안된다.
✔️하루라도 보험이 없던 기간이 있다면 보험가입이 안된다.
✔️세입자가 세입자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안다면 보험가입이 안된다.
이런저런 조건들 때문에 우리가 가입할 수 있는 보험회사가 아무 데도 없었다. 존 패밀리한테 일차로 오른쪽 뺨을 맞은 후 보험회사로부터 왼쪽 뺨까지 맞은 느낌이다.
점심을 차릴 생각도 먹을 생각도 없었다. 아빠가 눈치껏 콩나물 비빔밥을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식사 중에도 계속 보험회사와 통화를 하느라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는커녕 매우 살벌하고, 험악한 분위기에서 점심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아빠가 계셔서 마음이 놓여서 그런가? 투정 부릴 누군가가 필요했을까? 나답지 않게 못난 모습으로 오전 내내 징징 댔던 것 같아서 죄송스럽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의 속상함을 위로해 주시고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워 전전긍긍 보듬어 주시는 아빠 때문에 든든하고 행복했다. 그래서 더 오버하면서 힘든 척했을까?
죄송한 마음보다는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더 큰걸 보면 난 참 이기적인 딸래미다.
레슨 시간 전 잠깐 짬을 내서 걷기로 했다. 첫눈은 따뜻한 햇빛에 거의 다 녹은 모습이다. 눈이 온 뒤 낙엽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거리를 보니 시간의 흐름이 현실로 다가왔다. 곧 이별이 다가올 거라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할로윈 장식 앞에서 기념사진도 남겨본다. 한국으로 가시고 나면 아빠는 몇 번이고 이 사진을 꺼내서 추억을 더듬으시겠지?
아빠와 함께 걷는 동안 차가웠던 겨울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를 꼭 잡고 있는 아빠의 따뜻한 손 때문인지 햇빛조차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스트레스가 모두 달아난 산책 시간이었다
내친김에 저녁까지 아빠에게 부탁드렸다. 아빠는 기쁜 맘으로 손칼국수를 만드셨다. 막내 손녀와 함께 하는 요리추억까지 만드셨으니 오늘 아빠도 행복하셨을까? 점심을 굶어서 그런지 저녁은 후루룩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을 만큼 맛있었다. 따뜻하고 구수한 국물에 쫀득한 수타면이라니! 이게 행복일 것이다. 따뜻한 집에서,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음식을 가족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따뜻한 바지 하나 사드려야 할 것 같다. 이제 곧 알버타의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불 테니 놀라시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