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정해진 길 vs 내가 고르는 길

by 홍종민

시간의 딜레마


2019년 12월 31일, 자정을 10분 앞두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지금 진통이 왔어요. 오늘 낳을까요, 내일 낳을까요?"

임산부였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아이의 사주를 위해 출산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12월 31일 자시(子時)와 1월 1일 자시(子時)(가상 생년월일시), 단 하루 차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주가 된다. 기해년에서 경자년으로, 돼지띠에서 쥐띠로. 천간지지가 모두 바뀌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어느 쪽이 더 좋나요?"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무엇이 '좋은' 사주인가? 부귀영화? 평안무사? 그것을 누가 정하는가?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시간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시간이 우리를 선택하는가?

"아이가 선택하게 하세요." "그게 무슨..." "아이가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게 그 아이의 운명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상담실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들이 새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탑의 바늘이 자정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기계적인 시간과 인간의 탄생이라는 유기적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새벽 2시,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1월 1일 0시 23분에 낳았어요. 아이가 선택했어요."

그 아이는 정말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 시간에 태어날 운명이었을까? 이 질문은 내가 15년간 사주를 보면서 끊임없이 마주한 딜레마였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출산 시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제왕절개 수술 시간을 정할 수 있고, 유도분만으로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설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그 시간을 '선택'하는 것인가?

한 산부인과 의사가 내담자로 왔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왕절개 시간을 잡아놓고도 응급환자가 들어와서 미뤄지는 경우가 많아요. 계획했던 시간에 태어나지 못하는 아이들. 그것도 운명일까요?" 그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쩌면 그 응급환자가 들어온 것까지도 그 아이의 운명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도 사실은 더 큰 흐름의 일부일지도요."


사주를 아는 자의 무게


대학생 김진우(가명)가 처음 상담실을 찾았을 때, 그의 눈빛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스물두 살, 경영학과 3학년. 성적은 상위권, 대외활동도 활발,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인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 사주를 보니 예술가 사주라고 하더군요. 지금이라도 미대를 가야 할까요?"

그는 이미 여러 철학관을 다녀왔다. 모두가 그의 강한 식상(食傷)을 보고 예술을 권했다. 식신과 상관이 월지와 시지에 포진해 있었고, 일간을 생하는 구조였다. 전형적인 예술가적 기질의 사주였다. 하지만 그는 22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그림을 진지하게 그려본 적이 없었다.

"예술을 좋아하시나요?" "모르겠어요. 해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사주가 그렇다면..."

사주를 아는 것이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감옥에 가둔 것인가?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주명리학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과거에는 신분제 사회였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적이었다. 농민의 아들은 농민이 되었고, 상인의 아들은 상인이 되었다. 사주는 그 정해진 틀 안에서의 성패를 가늠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대에, 사주라는 '정답'을 아는 것이 과연 축복일까?

"사주는 가능성이지 명령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주를 거스르면 불행해진다고..." "사주를 모르고 살던 지난 22년은 불행했나요?"

그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는 경영학이 적성에 맞았고, 성적도 좋았다. 학과 활동도 즐겁게 참여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구체적이었다. 다만 '더 나은' 운명이 있을 거라는 환상에 흔들린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FOMO(Fear of Missing Out), 더 나은 선택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주를 아는 것이 이 두려움을 증폭시킨 것이다.

6개월 후, 그가 다시 찾아왔다. 얼굴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미술 학원을 다녀봤어요. 재능이 없더군요." "실망하셨나요?" "아니요, 오히려 시원해요. 이제 경영학에 집중할 수 있어요."

그는 사주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경영도 일종의 예술이더라고요. 창조적인 전략을 짜고, 조직을 디자인하는 것. 제 식상의 에너지가 여기서 발현되고 있었어요."

이것이 핵심이었다. 사주의 기운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 식상이 꼭 그림이나 음악일 필요는 없다. 창의적인 모든 활동이 식상의 영역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좁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좁은 해석에 스스로를 가둔다.


반복강박의 메커니즘


2020년 봄, 박서연(가명)이 세 번째 상담을 왔다. 서른여섯 살, 대학병원 의사. 첫 상담은 3년 전이었고, 그동안 같은 패턴이 정확히 세 번 반복되었다.

"또 그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정확히는 세 명의 다른 유부남이었지만, 놀랍도록 비슷한 유형이었다. 처음엔 미혼이라고 속이고 접근하다가, 관계가 깊어지면 진실을 고백하는 패턴. 그녀는 매번 분노하고 상처받으며 관계를 끊었지만, 몇 개월 후면 또 다른 유부남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의 사주에는 도화살(桃花殺)이 있었다. 월지와 시지에 각각 자오묘유(子午卯酉)가 포진해 있었다. 이성 문제가 복잡해지는 전형적인 암시다. 하지만 도화살이 있다고 모두가 불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녀만 이런 패턴을 반복하는가?

"왜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시나요?" "몰라요. 처음엔 달라 보이는데..."

정신분석적으로 들어가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외도로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열 살 때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했고, 그 충격으로 부모가 이혼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는 아버지 같은 남자를 혐오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계속 찾아다녔다.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었다.

"도화살이 이끄는 대로 사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도화살을 이용하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은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그런 남자를 선택해요. 왜일까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무의식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안전한 사랑이 무서워요. 영원할 것 같아서."

역설적이었다. 떠날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버림받는 것보다 낫다는 무의식. 도화살은 핑계였고, 진짜 문제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떠날 남자를 미리 선택함으로써, 버림받는 상처를 통제하려 했다. 차라리 예상된 이별이 예상치 못한 배신보다 낫다는 무의식적 계산.

"운명이 당신을 반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운명을 반복하는 거예요."

이 깨달음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 패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에게 끌리는지, 그 끌림 뒤에 어떤 신호가 있는지. 그리고 발견했다. 그녀가 끌리는 남자들은 모두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비밀이 그녀에게는 익숙함이었고, 그 익숙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1년 후, 그녀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상대는 평범한 미혼 남성이었다. 처음엔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그 '지루함'이 실은 '안정감'이라는 것을 배웠다. 도화살은 여전히 그녀의 사주에 있지만, 이제는 다르게 발현되고 있었다. 매력과 카리스마로, 불륜이 아닌 건강한 관계에서의 열정으로.


운명 개조 프로젝트의 역설


최은석(가명)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18년이었다. 쉰 살, 중견기업 오너. 자산 500억. 하지만 그의 표정은 500억의 여유가 아니라 5000만 원 빚진 사람처럼 불안했다. 그에게는 남다른 프로젝트가 있었다.

"제 사주의 모든 흉한 것을 바꾸고 싶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어요."

그는 이미 개명을 세 번 했다. 최은석에서 최원세로, 다시 최원승으로, 그리고 지금의 최은석으로. 한 바퀴 돌아 원점이었다. 집도 다섯 번 옮겼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제주도로, 다시 서울로. 풍수 전문가를 월급 주고 고용했고, 사무실과 집의 인테리어를 매년 바꿨다. 심지어 조상 묘를 세 번 이장했다.

"효과가 있었나요?" "글쎄요... 회사는 성장했지만 불안은 더 커졌어요."

그의 사주를 분석해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칠살(七殺)이 강하고 정인(正印)이 약한 구조. 도전과 경쟁심은 강하지만 마음의 안정은 부족한 사주였다. 그런데 그가 '개조'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 칠살이었다.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보니, 그의 아버지가 폭력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칠살의 공격성이 아버지를 연상시켰고, 그는 자신 안의 아버지를 지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칠살을 제거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발현되었다.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는 정신분석의 명제처럼.

"운명을 바꾸는 데 성공하셨나요?" "아니요. 운명의 노예가 된 것 같아요."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나요?" "모르겠어요.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의 경우, 운명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자유를 앗아갔다. 사주를 바꾸려 할수록 사주에 더 종속되는 역설. 그는 매일 아침 그날의 운세를 확인하고, 모든 결정을 사주에 의존했다. 계약 체결 시간, 회의 일정, 심지어 식사 메뉴까지도. 자유의지로 시작한 운명 개조 프로젝트가 결국 자유의지를 말살한 것이다.

전환점은 의외의 사건에서 왔다. 풍수 전문가가 갑자기 사직했다. 이유를 물으니 "회장님은 풍수가 아니라 심리치료가 필요하십니다"라고 했다. 그 말이 충격이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제가 바꾸려 한 것은 사주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요." "이제 아시는군요."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사주를 대하는 태도는 바꿀 수 있겠죠?"

그 후 그는 운명 개조를 멈췄다. 대신 자신의 칠살을 받아들이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공격성을 창의적 도전으로, 경쟁심을 자기 계발의 동력으로. 불안은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운명론과 자유의지의 공존


2021년 여름, 특별한 부부가 찾아왔다. 남편 정민수(가명), 아내 김은영(가명). 결혼 10년 차, 이혼 위기. 하지만 그들의 갈등은 성격 차이나 외도 같은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철학적 신념의 충돌로 싸우고 있었다.

남편은 철저한 운명론자였다.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라플라스의 결정론을 신봉했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현재 상태를 안다면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 그에게 자유의지는 환상이었고,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난 것도, 결혼한 것도, 지금 이혼 위기인 것도 모두 정해진 운명이에요."

아내는 극단적 자유의지론자였다. 실존주의 철학을 전공한 대학 강사. 사르트르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를 신조로 삼았다. 그녀에게 운명은 나약한 자들의 변명이었고, 모든 것은 선택의 결과였다.

"운명 따위는 없어요. 당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뿐이죠."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사주를 보니,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남편은 변화가 많은 역마살(驛馬殺)과 도화살(桃花殺)의 사주였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기운. 그런데 왜 운명론자가 되었을까?

"변화가 너무 많아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더군요. 미국 유학, 귀국, 직장 이동... 모두 외부 요인 때문이었어요."

반대로 아내는 고정적인 고진살(孤辰殺)과 화개살(華蓋殺)의 사주였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기운. 그런데 왜 자유의지론자가 되었을까?

"혼자 모든 걸 결정해왔어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의지할 게 제 선택뿐이었죠."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다. 남편은 운명에 책임을 떠넘겼고, 아내는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통제하려 했다. 운명론도 자유의지론도 각자의 상처를 정당화하는 방어기제였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운명은 주어진 조건, 자유의지는 그 안에서의 선택."

내가 그들에게 제안한 것은 '그리고'의 철학이었다. 운명론 '아니면' 자유의지론이 아니라, 운명론 '그리고' 자유의지론.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처럼, 모순되지만 공존하는 두 진실.

"남편분은 운명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해요. 아내분은 선택의 자유가 있되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이셔야 해요."

6개월간의 부부 상담 끝에 그들은 새로운 관점을 찾았다. 남편은 작은 선택들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아내는 받아들임의 지혜를 배웠다. 이혼 대신 그들은 '철학적 동반자 관계'를 선택했다. 서로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도전하는, 창조적 긴장 관계.


예언의 자기실현적 함정


2018년 가을, 스물다섯 살 청년 이준혁(가명)이 극심한 공황장애로 실려왔다. 정확히는 그의 어머니가 부축해서 데려왔다. 1년째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에 어떤 점쟁이가 올해 큰 사고가 날 거라고 했어요."

그 예언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엔 조심하는 정도였다. 운전을 자제하고, 위험한 활동을 피했다. 하지만 불안은 점점 커졌다. 계단도 무서워졌고, 길을 건너는 것도 두려워졌다. 급기야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사고가 났나요?" "아니요... 하지만 이 공황장애가 그 사고인 것 같아요."

예언이 불안을 만들고, 불안이 병을 만들고, 병이 예언을 실현시킨 것이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전형적인 사례. 로버트 머튼이 말한 "처음에는 거짓이었던 상황 정의가 새로운 행동을 유발하여 결국 참이 되는" 현상.

그의 사주를 보니 특별한 흉운은 없었다. 오히려 그해는 천을귀인(天乙貴人)이 들어오는 좋은 해였다. 그렇다면 그 점쟁이는 왜 그런 예언을 했을까? 나중에 알아보니, 그 점쟁이는 부적과 굿을 팔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이었다.

"그 점쟁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았겠죠." "그럼 운명이 당신을 아프게 한 건가요, 아니면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아프게 한 건가요?"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가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이었다는 것을. 그 해석이 만든 두려움이 진짜 감옥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새로운 '예언'을 했다. "당신의 사주를 다시 보니, 올해는 새로운 시작의 해네요. 공황장애는 오래된 자신을 벗고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같은 사주, 다른 해석. 그는 이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황을 병이 아니라 변화의 신호로, 두려움을 성장통으로 재해석했다.

1년 후,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극복의 경험이 자신감이 되었고, 이제 그는 공황장애 환자들을 돕는 상담사가 되었다.

"이제 점은 안 봐요. 모르는 게 자유로워요." "그럼 운명을 믿지 않으시나요?" "운명은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것을 미리 아는 것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에요."


양자역학적 운명 해석


2020년 겨울, 특별한 내담자가 찾아왔다. 김현준(가명) 교수, 45세, 양자물리학자. 그는 사주명리학의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학문적 관점으로 운명을 재해석하려 했다.

"사주명리가 과학적 근거가 있나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현대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통계적 상관관계는 있지만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죠."

"그런데 왜 맞는 것처럼 보이죠?"

그와의 대화는 6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는 양자역학의 여러 개념을 동원해 사주명리학을 해석했다. 특히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에 주목했다.

"양자 상태에서는 관찰 전까지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죠. 관찰하는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하나의 상태로 확정됩니다. 사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주를 '관찰'하는 순간, 무한한 가능성이 하나의 운명으로 수렴되는 것."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사주를 보기 전까지는 모든 운명이 중첩되어 있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사주를 해석하는 순간, 그 해석이 현실을 만든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나요?" "파동함수를 붕괴시키는 관찰자의 선택이죠. 어떻게 관찰하느냐, 즉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현실이 만들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30대 초반, 그도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대운이 바뀌는 시기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예언. 실제로 그 시기에 미국으로 연구년을 떠났고, 그곳에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운명대로 된 건가요?" "아니면 운명을 알았기에 그 시기에 더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은 건가요?"

이것이 양자역학적 운명론의 핵심이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공존하는 상보성(complementarity). 운명은 확률의 구름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선택과 해석이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날씨 예보를 생각해보세요. 내일 비 올 확률 70%. 이것은 결정론인가요, 비결정론인가요? 확률적 예측이지만, 그 예측을 아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바꿉니다. 우산을 가져가거나, 일정을 조정하거나. 운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트라우마가 만든 가짜 운명


서른다섯 살의 한지민(가명)이 찾아온 것은 2019년 봄이었다. 세 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첫 결혼은 2년, 두 번째는 1년 반, 세 번째는 불과 8개월 만에 파탄이 났다.

"제 사주에 이혼수가 있나요?"

그녀의 사주를 분석해봤다. 정관정인(正官正印)의 안정적인 구조. 특별한 이혼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우자 복이 있는 사주였다. 형충파해도 없었고, 도화살도 없었다.

"사주로는 문제가 없는데... 혹시 부모님이 이혼하셨나요?" "네, 제가 다섯 살 때요. 그 후로 엄마는 세 번 더 결혼하셨고요."

퍼즐이 맞춰졌다. 그녀에게 결혼은 '끝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결혼은 임시적인 관계였고, 이혼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어머니의 네 번의 결혼을 보며 자란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보니, 그녀는 항상 결혼 6개월 후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끝날까'를 생각하며 상대의 사소한 행동도 이별의 신호로 해석했다. 그 불안이 갈등을 만들고, 갈등이 이혼으로 이어졌다.

"운명 때문이 아니라 학습된 패턴이네요." "그럼 바꿀 수 있나요?" "운명은 못 바꿔도 패턴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는 것의 상당 부분은 사실 학습된 패턴, 내면화된 각본, 무의식의 반복강박이다. 트라우마가 만든 가짜 운명. 그것은 사주팔자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한다.

1년간의 집중 상담 끝에 그녀는 네 번째 결혼을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상대와 함께 부부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패턴을 공유했다. "6개월 후 불안이 올 거예요. 그때 저를 이해해주세요."라고 미리 말했다.

예상대로 6개월 후 불안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그 불안을 통과했다. 1년, 2년, 3년... 그녀의 최장 결혼 기록을 매일 갱신하고 있다.

"이제 알아요. 제 운명은 이혼이 아니라, 이혼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죽음 앞의 궁극적 자유


2019년 말, 특별한 내담자가 찾아왔다. 최영수(가명), 52세, 대기업 임원. 위암 4기, 시한부 6개월 선고.

"제 죽을 때가 사주에 나와 있나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사주를 펼쳤다. 특이하게도 사주에는 특별한 흉운이 없었다. 오히려 내년부터 10년 대운이 상승하는 구조였다. 정인(正印)이 들어와 건강과 안정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주로는 장수하실 팔자인데..." "그럼 제가 살 수 있을까요?"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의학적 진단과 운명론적 예측 사이에서 갈등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현대 의학의 정밀한 검사 결과인가, 아니면 수천 년 이어온 동양의 지혜인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실지는 선택할 수 있어요."

그가 웃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의 맑은 웃음이었다.

"처음으로 자유롭네요. 죽음이 확정되니 오히려 선택이 자유로워요."

그는 남은 6개월 동안 52년 인생에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30년 만에 첫사랑을 찾아가 사과했다. 소원했던 동생과 화해했다. 그리고 자서전을 썼다. '죽음이 가르쳐준 삶'이라는 제목으로.

기적은 6개월 후에 일어났다. 그는 죽지 않았다. 정기 검사에서 암세포가 극적으로 줄어든 것이 발견되었다. 의사도 설명할 수 없는 관해(remission)였다. 1년, 2년... 그는 계속 살았다.

"운명이 바뀐 건가요?" "아뇨. 운명을 받아들이니 자유가 왔고, 자유가 생명을 연장시킨 것 같아요."

그는 이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한다. 시한부 환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진짜 자유의 시작."

사주가 맞았을까, 의학이 틀렸을까? 아니면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을까? 중요한 것은 그가 운명과 자유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얻는 자유, 자유를 통해 바꾸는 운명.


운명 없는 아이들의 선택


2020년 가을, 특수학교 교사 김민정(가명)이 찾아왔다. 그녀는 10년째 중증 장애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장애 아이들의 사주는 어떻게 봐야 하나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주명리학은 사회적 성공, 결혼, 직업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평생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도 운명이 있나요?" "당연하죠. 다만 다르게 펼쳐질 뿐..."

그녀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뇌병변 1급,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매일 아침 선생님을 보면 웃었다. 힘겹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선택이었다.

"부모들은 왜 우리 아이가 이런 운명을 타고났냐고 물어요." "뭐라고 답하시나요?" "운명이 아니라 조건이라고 해요. 그 조건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나는 깨달았다. 운명론의 폭력성을. 모든 것을 운명으로 설명하려 하면,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선고가 된다. "전생의 업보다", "조상의 죄다" 같은 설명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녀와 함께 장애아 부모 상담을 시작했다. 사주를 보되, 다르게 해석했다. 이 아이가 가진 고유한 기질과 가능성을 찾았다. 비록 사회적 성공은 어렵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한 자폐아의 사주에 강한 편인(偏印)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외로움을 의미하지만, 다르게 해석했다. "이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예술가예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실제로 그 아이는 놀라운 그림 재능을 보였다. 말은 못하지만 그림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운명은 같지만 해석이 다르면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인공지능 시대의 운명


2021년 초, IT 스타트업 대표 박지훈(가명)이 찾아왔다. 그는 특별한 제품을 개발했다.

"AI로 사주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정확도가 90%가 넘어요."

그는 빅데이터와 머신러닝으로 사주 해석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10만 명의 사주와 인생 데이터를 학습시킨 결과였다. 입력하면 즉시 500페이지 분량의 상세한 분석이 나왔다.

"그럼 제가 필요 없겠네요." "그게... AI는 '무엇'은 맞추는데 '왜'는 모르더군요."

그의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AI는 패턴은 찾지만 의미는 모른다. 예측은 하지만 공감은 못한다. 통계적 확률은 제시하지만, 개인의 고유한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한다.

실제로 베타 테스트 결과가 흥미로웠다. AI의 예측 정확도는 높았지만, 사용자 만족도는 낮았다. 사람들은 정확한 답보다 따뜻한 위로를 원했다. 객관적 분석보다 주관적 공감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답이 아니라 이해받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운명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운명을 살아가는 인간을 이해하는 거죠."

우리는 협업하기로 했다. AI가 1차 분석을 하고, 내가 그것을 바탕으로 상담한다. 기계는 계산하고, 인간은 해석하고 공감한다. 효율성과 인간성의 결합.

6개월 후,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AI와 함께 상담받은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높았다. AI의 객관성이 신뢰를 주고, 인간의 공감이 위로를 준 것이다. 운명을 아는 것(AI)과 운명을 이해하는 것(인간)의 시너지.

"미래에는 AI가 운명을 예측하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코칭하는 시대가 올 것 같아요."


평행우주와 다중 운명


2021년 여름, SF 작가 이상민(가명)이 찾아왔다. 그는 사주 상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대화를 원했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무수한 내가 다른 운명을 살고 있겠죠?"

다중우주 이론에 따르면,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우주가 분기한다. A를 선택한 우주와 B를 선택한 우주로. 그렇다면 무한한 우주에 무한한 나가 존재하고, 각자 다른 운명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우주에서 제 운명은 뭔가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의 총합이죠." "다른 우주의 나는 다른 선택을 했겠네요." "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우주의 당신입니다."

그는 이 개념을 소설로 썼다. 같은 사주를 가진 주인공이 매 선택의 순간마다 다른 결정을 내리는 평행우주들. 어느 우주에서는 의사가, 어느 우주에서는 범죄자가, 어느 우주에서는 예술가가 된다.

"사주는 악보 같아요. 같은 악보도 연주자에 따라 다른 음악이 되듯이."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자들은 운명의 다양한 가능성에 매료되었다.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선택에 따라 무한히 분기하는 운명. 사주팔자는 시작점일 뿐, 도착점은 우리의 선택이 만든다는 메시지.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연속이네요."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죠."


운명과 자유의 변증법


15년간 수천 명의 운명을 보았다. 그리고 6년간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이제 나는 안다. 운명과 자유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킨다는 것을.

운명은 캔버스다. 크기와 재질이 정해진. 하지만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는 자유다. 어떤 색을, 어떤 형태를,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는 전적으로 화가의 선택이다.

자유의지는 붓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하지만 캔버스 없이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빈 공간에 휘두르는 붓질은 무의미하다. 운명이라는 캔버스가 있어야 자유가 의미를 갖는다.

사주명리학은 캔버스를 보여준다. 당신에게 주어진 조건, 가능성, 한계를. 정신분석은 붓을 잡는 법을 가르친다. 무의식의 방해를 제거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는 법을.

둘 다 필요하다. 캔버스만 있으면 백지로 남고, 붓만 있으면 허공을 그릴 뿐이다. 운명을 알고 자유를 행사할 때, 비로소 작품이 탄생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예술 작품이다.

한 내담자가 물었다. "그럼 결국 운명이 있나요, 없나요?"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한다.

"운명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한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운명과 자유 사이를 걷는 인간의 길입니다."

운명과 자유 사이, 우리는 영원히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다. 완전히 결정되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그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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