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은 정력이 강한 사람들인가요?"
후배가 갑자기 물었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나는 멈칫했다.
"왜 그런 생각을?"
"아니, 창작하는 사람들 보면 에너지가 넘치잖아요. 열정적이고. 근데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서요."
흥미로운 질문이다. 아주 흥미롭다.
사실 이 질문은 100년 전 프로이트가 씨름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의 발견을 했다. 인간 활동의 배후에는 성욕이라는 엔진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도, 일도, 예술도, 학문도 따지고 보면 성적 에너지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성적인 에너지를 의미했다. 그런데 연구가 진행되면서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의미를 확장했다. 단순히 성적 에너지만이 아니라 모든 심리적 에너지, 삶의 에너지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말이다. 리비도는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됐다.
처음 들으면 황당하다. "내가 그림 그리는데 그게 무슨 리비도?" "내가 수학 문제 푸는데 무슨 성적 에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라. 에너지라는 게 원래 형태가 바뀐다. 전기가 빛도 되고 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리비도도 마찬가지다. 성적인 것으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인간에게 리비도라는 성적 에너지가 있다면, 어떻게 성적인 활동이 아닌 다른 활동이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하루 종일 섹스만 하지 않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예술도 하는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1905년, 프로이트는 '승화'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았다. 리비도를 성적이지 않은 목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맹정현, 2022: 152)
쉽게 말하면 이렇다. 당신 안에 리비도라는 에너지 덩어리가 있다. 이 에너지는 원래 성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 예술에, 학문에, 일에. 그러면? 리비도는 똑같이 소진되지만 방식이 다르다. 성행위 대신 작품이 나온다.
바로 이거다. 이게 승화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면 안 되는 게 있다. 승화와 억압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조목조목 짚어보자.
당신 몸속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해보라. 댐에 물이 가득한 것처럼. 이 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댐을 꽁꽁 막는다. 물이 한 방울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게 억압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압력이 쌓인다. 댐이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간다. 결국 어딘가 터진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게 억압의 오묘한 팩트다. 에너지를 막으면 증상이 생긴다. 불안, 강박, 우울. 막힌 에너지는 반드시 어딘가로 나간다. 정상적인 통로가 막히면 비정상적인 통로를 찾는 법이다.
둘째, 댐에서 물을 발전소로 보낸다. 물은 흐른다. 막히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성적인 쪽이 아니라 창작 쪽으로. 그러면? 전기가 생긴다. 빛이 켜진다. 작품이 나온다.
이게 승화다. 에너지를 틀어주는 것이다. 막지 않고.
주위를 보면 피부로 실감한다. 작품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들. 마감 전 작가들. 연구에 빠진 학자들. 그들에게 지금 연애가 중요한가? 아니다. 관심도 없다. 왜? 에너지가 이미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소설가를 알고 있다. 그는 집필 기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친구들 만남? 취소. 연애? 생각도 안 난다. 오로지 글만 쓴다. 하루에 12시간씩. 그런데 그가 고통스러워 보이는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다. 눈이 반짝인다.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글로.
반면 다른 사람을 보자. 그는 항상 불만스럽다. 뭘 해도 만족이 안 된다. 일도 재미없고, 취미도 시시하고, 관계도 공허하다. 왜? 에너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썩어가고 있는 셈이다.
차이가 보이는가?
승화는 에너지를 틀어준다. 막지 않는다. 억압은 에너지를 막는다. 흐르지 못하게 한다. 이게 둘의 결정적 차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오묘한 팩트가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관찰하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아이들은 세상 모든 것을 탐구한다. 뭐든지 입에 넣어본다. 손에 잡히는 건 다 만져본다. 흔들어본다. 깨뜨려본다.
왜 그럴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다. 그게 아니다.
아이는 자기 몸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빨 수 있는가? 깨물 수 있는가? 쥘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아이에게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활동이 동시에 쾌락이기도 하다. 빠는 것 자체가 기분 좋다. 만지는 것 자체가 즐겁다.
여기서 앎과 쾌락이 만난다. 탐구와 욕망이 합쳐진다.
프로이트는 이를 '인식애적 충동'이라고 불렀다. (맹정현, 2022: 157) 지식을 좋아하는 충동.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섹스가 되는 경우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할 때 묘한 흥분을 느낀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순간 전율이 온다. 복잡한 문제를 풀었을 때 황홀경을 느낀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앎 자체가 충동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화와 인식애적 충동은 어떻게 다른가?
승화는 간접이다. 성적 에너지를 예술에 쓴다. 예술은 성행위가 아니다. 다만 같은 에너지원을 쓸 뿐이다. 자동차가 휘발유로 가듯이.
인식애적 충동은 직접이다. 아는 행위 자체가 쾌락이다. 탐구 자체가 욕망의 충족이다.
차이가 보이는가? 승화는 우회다. 인식애적 충동은 직행이다.
실제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이게 생생하게 와닿는다.
한 남학생이 있었다.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면 이상하게 불안했다. 심장이 뛰었다. 집중이 안 됐다. 성적은 좋았지만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공부는 금지된 쾌락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건 다 하지 말고 공부만. 그래서 공부가 유일한 허용된 활동이 됐다. 놀이도 금지, 친구도 금지, 오직 공부만 허용.
그러다 보니 모든 욕망이 공부로 쏠렸다. 공부가 지나치게 성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결과는? 공부 자체가 불안의 대상이 됐다.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피하고 싶어졌다. 이게 지적 활동을 성화(性化)시킬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반대 사례도 있다. 한 여성은 공부할 때 희열을 느꼈다. 새로운 걸 배울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왔다. 책을 읽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너무 강렬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공부만 하고 싶었다. 다른 건 의미가 없었다. 관계도 일도 다 팽개쳤다.
두 경우 모두 같은 문제다. 지적 활동이 지나치게 성적 에너지와 결합된 경우다. 적당하면 동력이 되지만 지나치면 마비가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관찰하라. 당신의 에너지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일에 몰두할 때 다른 욕구가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승화가 작동하고 있다. 좋은 신호다.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르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뭘 해도 불만족스러운가? 항상 뭔가 모자란 느낌인가? 그렇다면 에너지가 막혀 있을 수 있다. 흐를 통로를 찾아야 한다.
아니면 특정 활동을 할 때 지나치게 흥분되는가? 그 활동 없이는 못 살 것 같은가? 그렇다면 그 활동이 지나치게 성화됐을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핵심은 이거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디로 가느냐가 다를 뿐이다.
당신 안의 에너지를 억압하지 마라. 억압하면 언젠가 터진다. 그렇다고 그대로 표출하라는 것도 아니다.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틀어라. 건강한 방향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창작으로, 탐구로, 일로. 그러면 에너지가 흐른다. 막히지 않고 흐른다.
후배에게 다시 말했다.
"예술가들이 성욕이 강해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야. 예술을 하면서 리비도를 쓰는 거지. 같은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쓰는 거야."
후배가 물었다. "그럼 리비도가 뭐예요?"
"프로이트가 붙인 이름이야. 처음에는 성적 에너지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의미가 확장됐어. 모든 심리적 에너지, 삶의 에너지 전체를 리비도라고 부르게 된 거지. 근데 이게 꼭 섹스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창작으로도, 학문으로도, 일로도 표현될 수 있어."
"그럼 저는 뭘 하면 될까요?"
"네가 뭘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는지 보면 돼. 그게 네 리비도가 흐르는 방향이야."
당신은 뭘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는가?
그게 당신의 승화 방식이다. 그게 당신의 에너지가 흐르는 통로다. 그게 바로 진실이다.
중요한 건 막지 않는 것이다.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생동한다. 에너지가 순환한다.
문은 당신이 열 수 있다. 어느 문을 열지는 당신의 몫이 아니다. 이미 당신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라.
그게 답이다.
맹정현(2022). 프로이트 패러다임. 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