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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나와 내가 행동하는 나

by 홍종민

언행불일치, 그 분열의 심리학


저번주 일요일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 도서관에 갈 것인가, 아니면 40분 거리에서 열리는 한국 메이저 골프 대회를 보러 갈 것인가. 일단 커피나 마시면서 생각해보자. 두 곳 모두 가는 길에 있는 당골편의점으로 차를 몰았다. 편의점에 들어섰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서관? 골프대회? 골프대회? 도서관? 그런데 내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커피를 집어 들고, 요기할 단백질 바를 고르고, 음료수까지 바구니에 담는 나를 발견했다. 잠깐. 이건 도서관 가는 사람의 장바구니가 아니었다. 골프 대회장에서 몇 시간 보낼 사람의 먹거리였다. 편의점을 나와 차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어디를 갈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네비게이션에 골프대회 주소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선택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말로는 "어디를 갈까?" 하고 있었지만, 행동으로는 이미 골프대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내 말과 내 행동이 따로 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엇갈린 걸까? 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밤마다 야식을 찾는다.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주말마다 시끄러운 파티를 즐긴다. "요즘 너무 힘들다,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이걸 단순히 의지 부족이나 거짓말로 치부하기엔, 뭔가 더 깊은 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분열된 주체다."


분열된 주체.


무슨 뜻일까? 라캉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세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이 세 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면서, 우리는 분열된다.


상상계는 거울 속 나의 이미지다. 아기가 처음 거울을 보고 "저게 나야!"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 나가 아니다. 김석은 라캉의 거울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거울단계는 자아가 필연적인 오해의 산물이며 주체가 소외되는 장소"(김석, 2022: 150)다.

우리가 만든 자아 이미지는 애초에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이 이미지를 붙들고 산다. "나는 조용하고 우아한 사람이야." 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왜? 그 이미지는 애초에 허상이었으니까.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다. 법, 규범, 사회적 구조. 우리는 이 언어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려 한다. 하지만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라캉의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다.

기표는 말의 형식이다. 소리, 단어, 문자 자체. 우리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껍데기다. "사랑"이라는 단어, "힘들다"는 표현, "쉬고 싶다"는 문장. 이것들이 기표다.

기의는 그 말이 가리키는 의미다. 기표 뒤에 숨어 있는 실제 내용. 그런데 문제는 이 기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기표 하나를 생각해보자. 어떤 이는 로맨틱한 감정을 떠올린다. 어떤 이는 헌신을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집착을 연상한다. 같은 기표지만, 기의는 사람마다, 맥락마다, 순간마다 다르다.


라캉은 말했다. "기의는 기표 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이게 무슨 뜻일까?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그 말 아래에는 "인정받고 싶다",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 "쉬면 불안하다" 같은 여러 기의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붙잡을 수 없다.

기표는 또 다른 기표를 부른다. "힘들다"는 "쉬고 싶다"를 부르고, "쉬고 싶다"는 "하지만 멈출 수 없다"를 부르고, "멈출 수 없다"는 "가치 증명"을 부른다. 이렇게 기표의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정작 우리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기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김석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의 한 축인 상상계적 차원은 동시에 언어의 장벽으로 작용하여 인간 상호 간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기도 한다"(김석, 2022: 151).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지만, 기표와 기의의 이 불안정한 관계 때문에 언어가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것이다. 내가 입으로 내뱉는 기표와, 내가 진짜 욕망하는 기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균열. 결핍. 찢어진 틈. 상상계와 상징계가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실재계에서 비롯되는 충격이나 결핍은 우리를 계속 흔든다. 그래서 우리는 분열된다. 의식적으로 말하는 나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나가 따로 논다.


구체적으로 보자.


"힘들다"면서 계속 일을 벌이는 사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즘 너무 힘들고 지쳤다. 쉬고 싶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주말 세미나에 참석한다. 더 바쁘게 일정을 채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여기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가 일어난다.

기표: "힘들다", "쉬고 싶다" 의식적 기의: 휴식, 여유, 편안함 무의식적 기의: 인정 욕구, 가치 증명, 멈추면 생기는 불안

의식 차원에서는 "힘들다"는 기표를 내뱉으면서 "쉬고 싶다"는 기의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의식 차원에서는 "멈추면 내 가치가 사라진다"거나 "인정받고 싶다"는 완전히 다른 기의가 작동하고 있다.


"힘들다"는 기표 아래에서 "인정 욕구"라는 기의가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기표는 하나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기의는 계속 바뀐다. "힘들다" → "쉬고 싶다" → "하지만 멈추면 안 된다" →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 "인정받고 싶다". 기의는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그래서 말은 "쉬고 싶다"지만, 행동은 "더 많은 일을 벌인다"가 된다.


"시끄러운 건 싫다"면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좋아. 떠들썩한 곳은 질색이야." 하지만 실제 행동은? 주말마다 밤늦게까지 파티와 클럽에서 신나게 춤추고 논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다시 기표와 기의를 분리해보자.

기표: "조용한 게 좋다", "시끄러운 건 싫다" 의식적 기의: 차분함, 고요함, 평화 무의식적 기의: 흥분, 에너지 분출, 사회적 쾌락

의식 차원에서는 "조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상상계의 이미지를 붙들고 있다. "나는 우아하고 차분한 사람이야"라는 자아상. 하지만 무의식 차원에서는 "흥을 발산하고, 사람들과 에너지를 공유하며 쾌락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 살아있다.

"조용한 게 좋다"는 기표 아래에서 "쾌락과 흥분"이라는 기의가 미끄러지고 있다. 내가 입으로 말하는 것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다르다. "다이어트한다"면서 야식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엔 반드시 살을 빼야 해. 더 이상 야식은 안 돼." 하지만 실제 행동은? 밤마다 야식, 치킨, 피자 유혹에 흔들리고, 결국 폭식 후 자책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또다시 기표와 기의의 분열이다.


기표: "다이어트하겠다", "야식은 안 된다" 의식적 기의: 날씬함, 건강, 자기 통제 무의식적 기의: 위안, 쾌락, 정서적 보상

의식 차원에서는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을 말한다. "다이어트"라는 기표로 "건강한 몸"이라는 기의를 가리킨다. 하지만 무의식 차원에서는 음식이 주는 위안, 쾌락, 혹은 다른 정서적 보상 욕망이 강하게 남아있다.

"다이어트"라는 기표 아래에서 "정서적 위안"이라는 기의가 미끄러진다. 야식이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외로움, 불안, 스트레스를 달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표는 "다이어트"를 외치지만, 무의식의 기의는 "위안"을 찾고 있다. 라캉은 이런 말들을 **"빈 말"**이라고 불렀다. 빈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못한다. 주체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하더라도, 실제로 "왜 내가 이렇게까지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나?" 하는 무의식적 이유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말은 빈 말에 머문다. 다이어트 선언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운 건 싫다"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말 자체가 얕은 수준에 머물러 무의식적 욕망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행동은 말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럼 **"꽉 찬 말"**은 뭘까?


꽉 찬 말은 말하는 순간 무의식적 진실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그 진실을 인식함으로써 주체가 변화할 가능성을 여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런 고백이 나온다면 어떨까. "사실 나는 멈춰 버리면 내가 가치 없게 느껴질까 봐 쉬지 못해. 그래서 '힘들다'고 하면서도 더 많은 공부를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어." 이건 꽉 찬 말이다. 이전의 언행불일치를 재해석할 계기가 된다. 주체는 "내가 의식적으로 말하던 것과 무의식적으로 원하던 것이 달랐구나"를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을 조정하거나, 적어도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깨닫고 스스로의 모순을 좀 더 주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내 지인 B씨의 이야기를 해보자. B씨는 개인사업을 하면서 특정 정당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나에게 전화가 왔다. "정당활동을 그만둘까 하는데……." 통화 내용은 이랬다. "요즘 정당 쪽에 실망이 커서 거의 안 하려고 해. 위원장 자리에 미련도 없고, 주변에서 모함을 하니 힘들어." 그런데 실제 행동은 달랐다. 며칠 후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그날 서울 집회에 가야 한다"면서 정당활동을 우선시했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B씨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봤다. 대추차 안에 잣이 떠 있고, 옆에 놓인 티스푼이 왼손잡이용인지 다소 불편한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이 이미지를 라캉식으로 분석해보면:

대추차: B씨가 원하는 것, 즐기는 것. 개인사업과 정당활동을 통해 얻을 미래의 이익.


잣: 대추차 안에서 잉여물처럼 떠 있는 "덤 이익." 예상치 못한 보너스.


티스푼의 위치: 불편해도 어쨌든 차를 저어서 마실 수 있다는 의미. 작은 불편쯤은 감수하더라도 결국 이익을 취한다는 뜻.


B씨가 정당활동에 투덜대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참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힘들다, 사람들의 모함에 실망했다"고 말하지만, 약간의 불편은 감수할 만한 수준이고, 정치적 자리나 혜택 같은 잉여 이익이 여전히 탐나는 것이다.


B씨의 기표와 기의를 정리하면:


기표: "정당활동 그만두고 싶다", "실망했다", "힘들다" 의식적 기의: 피로, 상처, 거리두기 무의식적 기의: 정치적 이익, 위원장 자리, 인맥, 미래의 혜택


B씨의 말은 빈 말이었다. 무의식적 욕망과 연결되지 않는 말. "그만두고 싶다"는 기표를 내뱉지만, 그 아래에서 "하지만 얻을 게 있다"는 기의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 말이 된 것이다.


대추차 이미지는 이 무의식적 기의를 정확히 드러낸다. 약간 불편한 티스푼 위치(불만과 고충)에도 불구하고, 결국 달콤한 대추차와 잣(이익)을 마시고 있다는 것. 라캉은 말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무의식도 기표와 기의의 구조를 따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말실수, 꿈, 증상. 이 모든 것은 언어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특정한 기표를 말하거나 특정한 기의를 억압하려 하지만, 기표 사슬이 억압된 기의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다.


기표와 기의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기의를 억압하더라도, 기표는 계속 다른 기표를 부르고, 그 과정에서 억압된 기의가 어느 순간 말실수나 행동으로 튀어나온다.

언행불일치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A라는 기표를 말하지만(의식), 무의식 차원에서는 B라는 기의를 욕망하고 있으며, 이 억압된 기의가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말실수를 생각해보자.


"난 결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하려던 순간 "사랑… 아니, 싫어해"라는 식으로 말을 잘못 내뱉는 경우.


기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려 함 억압된 기의: 실은 사랑하고 있다

억압된 기의가 기표 사슬의 틈으로 빠져나와 말실수를 통해 돌아온 것이다. "사랑"이라는 기표가 먼저 튀어나온 순간, 무의식이 자신을 드러냈다.

증상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신체적 통증이나 반복 강박 행동이 특정 억압된 기의를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말로는(기표로는) 표현하지 못한 무의식적 욕망이나 트라우마가 증상이라는 다른 기표로 변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언행불일치도 이런 귀환 형식과 유사하다.


빈 말로는 가려진 무의식을, 꽉 찬 말이 제대로 붙잡지 않는다면, 행동이나 증상 등 다른 방식으로 그 억압된 기의가 표면화된다. "쉬고 싶다"는 기표 아래 억압된 "인정 욕구"라는 기의가 행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언행불일치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무의식이 다른 통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원래 분열되어 있다고. 상상계가 주는 허상적 통일감, 상징계의 구조적 한계, 실재계가 초래하는 말로 담기지 않는 결핍. 이 모든 게 맞물려, 우리는 끊임없는 균열 상태에 놓인다. 언행불일치는 바로 이 균열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먼저, 자책하지 마라. 당신이 의지가 약한 게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분열된 주체로 살아가는 게 인간의 본질이니까.

둘째, 당신의 언행불일치를 관찰해보라. "나는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렇게 행동하네." 그 간극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은 무의식적 욕망과 마주할 수 있다. "왜 내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를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셋째, 빈 말에서 꽉 찬 말로. "나는 힘들다"는 빈 말을 반복하지 말고, "사실 나는 멈추면 가치 없게 느껴질까 봐 쉬지 못한다"는 꽉 찬 말로 전환해보라. 그 순간 당신은 자신의 무의식적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행동을 조정할 가능성이 열린다.

넷째, 혼자만 알고 있지 마라. 당신이 보지 못하는 걸 다른 사람은 본다. 친구에게 넌지시 물어봐라. "나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은 당신보다 당신의 모순을 먼저 알아챈다. 가족에게 물어봐라. "내가 지금 뭐 하는 거 같아?" 새로운 시각이 생긴다. 언행불일치는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분열된 주체로서의 존재 조건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적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골프대회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이미 무의식적 선택을 드러내고 있었듯이, 우리의 언행불일치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깊은 욕망의 신호일 수 있다. 당신도 지금, 무언가를 말로는 거부하면서 행동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 간극을 발견하라. 그리고 물어보라.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참고문헌

김석(2022). 『에크리』.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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