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 간 진짜 이유
책을 사는 의식
대학원 출석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동문 한 명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교보문고에 자주 가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요즘 누가 오프라인 서점에 가나. 클릭 몇 번이면 집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에.
"인터넷으로 사면 편하지 않아?"
"아뇨, 직접 가서 골라야 해요. 알라딘도 가고 영풍문고도 가지만, 교보문고를 제일 자주 가요."
묘한 집착이 느껴졌다. 어떤 책을 보느냐고 물으니 답이 애매했다.
"이것저것요. 그냥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걸 사요."
"몇 권 사?"
"요즘엔 항상 2권 이상이요. 예전엔 1권만 샀는데요."
여기서 귀를 세웠어야 했다. 신호를 포착했어야 했다.
책을 1권 사던 사람이 갑자기 2권 이상 사기 시작했다. 교보문고 방문 횟수도 늘었다. 그런데 정작 그 책들을 완독하지 못한다고 했다.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변화에는 필연적으로 원인이 존재한다.
책을 사지만 읽지 못한다. 사기 위해 가지만, 끝내지 못한다.
모순이다. 명백한 모순이다.
"완독을 못 한다고?"
"네, 중간까지 읽다가 멈춰요. 그러다 또 서점 가서 새 책을 사고요."
순간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혹시 아버지와 자주 갔던 곳이야? 교보문고가?"
동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눈가가 붉어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전치의 메커니즘: 장소로 옮겨진 슬픔
프로이트가 발견한 방어기제 중 하나가 '전치(displacement)'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원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놓는 심리 작용이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손에서 손으로 옮기듯, 마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리저리 옮긴다.
바우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이 감정은 다양하게 위장된 방식으로 전달된다. 예컨대, 그것은 전치되어 표현되기도 한다"(바우어, 2023: 70).
교보문고는 동문에게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그곳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책을 고를 때마다 아버지가 책 읽는 자신을 대견해하며 격려했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서가를 돌아다니는 동안 아버지의 손이 자기 어깨를 두드렸을 것이다.
의식은 말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지만 무의식은 다르게 작동한다. "교보문고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간다. 자주 간다. 예전보다 더 자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교보문고라는 장소로 전치한 것이다. 직접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엔 고통이 칼날처럼 예리하다. 그 슬픔을 직면하면 무너질 것만 같다. 그래서 마음은 우회로를 택한다. 서점 가는 것으로, 책 사는 것으로, 그 고통을 옮겨놓는다.
전치는 선택이 아니다. 생존 전략이다.
2권의 의미: 동일시와 형제자리
그런데 왜 하필 2권일까. 1권에서 2권으로 늘어난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문은 맏딸이다. 아버지한테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이 사랑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맏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서 아들러의 형제자리 이론이 작동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출생 순위가 성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장남과 장녀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책임감이 강하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이건 학습된 것이 아니다. 자리가 만드는 운명이다.
동문은 맏딸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맏아들이었다. 둘은 같은 형제자리를 공유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로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첫째가 짊어져야 할 무게를, 첫째만이 아는 외로움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을 더 사랑했다. 자기 자신을 보았으니까. 딸도 아버지에게 더 의지했다. 자기를 가장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토만은 말한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다루고 돌볼 때 자신들의 형제 경험을 활용한다"(토만, 2009: 72). 맏아들 아버지는 맏딸 딸을 이해한다.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까. 같은 무게를 짊어졌으니까.
동일시(identification)가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딸에게서 자신을 봤고, 딸은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봤다. 둘은 서로의 거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저승으로 가셨다.
이제 동문은 혼자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자기 자신을 비춰줄 거울이 깨졌다.
책 1권은 자기 것이다. 하지만 2권?
두 번째 책은 아버지 것이다. 틀림없다.
동문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몫까지 책을 산다.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함께 읽었을 책을. 아버지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2권을 사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증명이다. 아버지가 여전히 옆에 있다는 환상이다.
전이의 공간: 기다림의 장소
그렇다면 왜 완독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전이(transference)를 이렇게 정의했다. 과거의 관계를 현재의 관계로 옮겨놓는 것. 유년기의 중요한 인물에게 느꼈던 감정을 지금 여기의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
정신분석에서 전이는 주로 분석가와 내담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내담자는 분석가를 통해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나고, 유년기의 자기 자신을 만난다.
동문에게 교보문고는 일종의 분석실이다. 그곳은 아버지와 만나는 공간이다. 서가를 돌아다니는 동안, 책을 고르는 동안,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
그 순간 만남은 끝난다. 단호하게. 완전히.
완독은 이별을 의미한다.
책을 다 읽으면 교보문고에 갈 이유가 없다. 아버지를 만날 핑계가 사라진다. 그래서 그녀는 멈춘다. 중간에 멈춘다.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내지 않는 건, 이별을 끝내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 그거다.
의식은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하지만 무의식은 거부한다. 끝나지 않은 책이 있는 한, 아직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교보문고는 그래서 '기다림의 장소'다.
아버지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곳.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는 곳. 죽음을 부정하고, 이별을 거부하고, 상실을 유예하는 공간.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
완독하지 못하는 건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 때문이다.
의식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죽었다. 나는 혼자다. 이제 책을 끝까지 읽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저항한다. 격렬하게. 완강하게. "아직 아니다. 아버지는 교보문고에 있다. 책을 끝내면 안 된다. 끝내면 정말로 끝이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두 세계가 충돌한다.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
충돌은 폭력적이다.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읽다가 멈춘다. 충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의식은 "계속 읽어"라고 명령하지만, 무의식은 "멈춰, 아직은 안 돼"라고 비명을 지른다.
동문은 그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진다.
그리고 또 서점에 간다. 새 책을 산다. 다시 시작한다. 다시 아버지를 만난다.
반복이다. 끝나지 않는 반복.
포나기는 말한다. "내담자는 분석가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나고, 유년기의 자기 자신을 만난다"(포나기 외, 2020: 243).
동문은 교보문고를 통해 아버지를 만나고, 과거의 자기 자신을 만나고, 상실 이전의 세계를 만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르게 경험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가 떠나지 않는 세계를.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세계를.
당신의 교보문고는 어디인가
당신도 다르지 않다.
당신에게도 교보문고가 있다. 장소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다.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곳. 상실을 부정하는 공간. 이별을 끝내지 않으려고 반복하는 행동.
혹시 당신도 끝내지 못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정리하지 못하는 물건이 있지 않은가. 지우지 못하는 전화번호가 있지 않은가.
전부 똑같은 메커니즘이다.
상실은 너무 고통스럽다.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로를 택한다. 다른 대상으로 옮겨놓는다. 장소로, 물건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반복한다. 끝내지 않으려고. 헤어지지 않으려고.
동문의 미완독 책들은 슬픔의 기록이다. 사랑의 증거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말해주는 증언이다.
책을 끝내지 못하는 건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건 강렬한 사랑의 표현이다. 차라리 끝내지 않겠다는, 아직은 보내지 않겠다는,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는 책을 완독해야 한다. 진짜 이별을 해야 한다. 아버지가 교보문고에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게 애도(mourning)다.
애도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라진 것을 사라진 것으로 인정하는 작업이다. 고통스럽다.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필요하다.
책을 완독하는 순간, 동문은 아버지와 진짜로 이별한다. 교보문고는 더 이상 기다림의 장소가 아니게 된다. 그냥 서점이 된다.
그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일이다.
아버지는 교보문고에 갇혀 있지 않다. 동문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맏딸로서 짊어졌던 무게를, 첫째로서 느꼈던 외로움을, 그 모든 걸 함께 나눴던 사람으로.
동일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공유했던 형제자리의 유대는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바뀔 뿐이다. 교보문고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마음이라는 내적 공간으로.
완독의 용기
동문에게 말했다.
"다음에 책 살 때, 1권만 사봐. 그리고 그걸 끝까지 읽어봐."
그녀가 물었다. "왜요?"
"아버지 몫까지 사지 않아도 돼. 아버지는 이미 네 안에 있으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
"책을 완독하는 게 무섭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완독하는 게 이별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버지와 함께 읽었던 시간을 완성하는 거야. 끝내지 않고 미뤄두는 게 아니라, 제대로 끝맺는 거지."
침묵이 흘렀다.
"그게 진짜 아버지를 기리는 방법일 수 있어. 미완의 상태로 붙들어두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
동문이 천천히 말했다. "생각해볼게요."
그걸로 충분했다.
전이를 넘어서
전이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개발한 생존 전략이었다. 상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별의 아픔을 분산시키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전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아, 나는 지금 아버지를 교보문고로 전치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책을 끝내지 않음으로써 이별을 끝내지 않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다. 자각이 곧 치유의 출발점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전치되어 있는지 찾아보라. 어떤 장소에, 어떤 물건에, 어떤 행동에 그 사람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전치를 풀어내라. 구체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공간으로 옮겨오라.
그게 애도의 작업이다. 상실을 통과하는 길이다.
교보문고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기다림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 될 것이다.
아버지 몫의 책을 사는 대신, 당신 자신의 책을 고르는 곳.
미완독의 슬픔을 쌓아두는 대신, 완독의 기쁨을 누리는 곳.
그리고 그건 가능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당신의 전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문헌
그레고리 바우어 / 정남운 역(2023). 『지금-여기에서의 전이 분석』. 학지사.
피터 포나기 외 / 유성경 외 역(2020). 『성격장애의 정신역동치료』. 학지사.
발터 토만(2009). 『가족상담과 형제자리』. 경남가족상담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