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이 사는 건 물건이 아니다

by 홍종민

방송 게스트로 나온 한 배우가 고백했다. "요즘 제가 좀 이상해요.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마다 쇼핑을 해요. 명품 매장에 가서 가방을 사거나, 새벽에 온라인 쇼핑몰을 뒤지면서 이것저것 담아요. 카드를 긁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지는데, 집에 와서 택배 상자를 열면 또 공허해져요. 그러면 또 사고. 이게 대체 뭘까요?"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MC가 농담으로 넘기려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방청객 몇몇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 한 여성을 떠올렸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외출 시마다 돈을 쓰며 심리적 고통을 달랬던 사람. 그녀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했고, 아버지의 존재 없이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였다.


불안은 자동으로 지갑을 연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불안 상태에서 돈을 쓰는 행위는 변함없이 작동한다. 마음이 부모나 과거의 누군가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 그 묶임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돈을 지출한다.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돈 지출 없는 불안 해소는 기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이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 그 순간에만 원했던, 실질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이다. 한 여성은 외출할 때마다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구매를 반복했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감정적 에너지 대신 돈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보네만, 2023: 114).

진짜는 이거다. 그녀는 물건을 사는 게 아니었다. 자유를 사려 했던 것이다.


대변과 돈, 무의식의 놀라운 등식

무의식은 돈을 대변과 동일시한다.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신분석학이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확인해온 사실이다.

가족에게 송금해야 하는 시기만 되면 장 질환으로 고생하는 여성. 상담비를 지불할 때마다 신체 증상으로 반응하는 환자. 자녀들에게 음식물의 효용을 극대화하려고 소화 과정을 길게 유지하라고 가르친 부유한 금융인(보네만, 2023: 57). 이들의 무의식 속에서 돈과 대변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배변 훈련을 받을 때 처음으로 "제공"과 "보유"를 배운다고 말했다. 부모의 요구에 따르면 칭찬받고, 거부하면 꾸중 듣는다. 대변은 아이가 부모에게 바칠 수 있는 첫 번째 증표이자, 자신의 몸 일부를 내보내는 첫 번째 분리 체험이다.

이 체험이 무의식 깊숙이 새겨진다. 평생 동안.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돈을 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내 일부를 떼어준다"고 느낀다. 돈을 받을 때는 "무언가를 내 안에 채운다"고 느낀다.

틀림없다. 이게 메커니즘이다.


아버지 없이 방을 떠날 수 없을 때

상담실에서 만난 한 여성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내가 만난 건 아니고, 정신분석 문헌에 기록된 사례지만, 뇌리에 박혔다.

그녀는 유년기에 아버지가 관장제를 빈번하게 사용하며 그녀의 배변 기능에 과도하게 개입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아버지 부재 시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었고, 오로지 아버지가 지켜볼 때만 공간 이동이 가능했다(보네만, 2023: 114).

여기서 "공간 이동"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를 뜻한다. 화장실에서 나온다는 물리적 의미와, 아버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는 심리적 의미. 그녀에게 이 둘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가 혼자 외출하려 하면 공포가 태풍처럼 몰아쳤다. 그 공포를 막기 위해 그녀는 돈을 썼다. 무계획적으로, 비합리적으로, 즉각적으로. 이것은 모순적 자율성의 시도였다.

무의식이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내 감정적 애착은 아직 자유롭게 할 수 없지만, 금전만큼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가능한 유일한 저항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고 한다. 소비할 명분을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건 아닌지.


쇼핑백 속의 욕망 전환


동네를 걷다 보면 보인다. 쇼핑백을 여러 개 든 사람들. 택배 수령 알림에 환호하는 얼굴들. 그들이 사는 물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그 순간에만 가치가 있다는 것.

당장은 절실히 원하지만, 구매 후 며칠이면 쓸모없어지는 것들. 옷, 액세서리, 화장품, 책, 전자기기.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빠르게 옮겨가는 구매 패턴. 표류하듯 떠도는 욕망.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억압된 욕망의 상징적 만족이다.

감정적 에너지를 무수히 많은 대상으로 빠르게 연속적으로 이동시키고 싶지만, 신경증이 그것을 금지한다. 그래서 대신 돈을 여러 대상에게 빠르게 이동시킨다. 하나 사고, 또 하나 사고, 또 하나 사고. 마치 여러 사람과 짧고 일시적인 관계를 맺듯.

상업화된 친밀감의 구조와 유사하다. 그곳에서도 돈은 순간적이고 교체 가능한 관계를 획득하는 수단이다. 불안 속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진짜 친밀감을 나눌 수 없으니, 금전으로라도 일시적 연결을 구매할 것이다."

현장에서 보면 생생하게 와닿는다. 백화점을 배회하며 이것저것 사는 사람들의 눈빛. 온라인 쇼핑 카트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손끝.

그들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자유다. 감정을 자유롭게 흘려보낼 수 있는 능력. 사랑을 마음껏 줄 수 있는 권리.



반항으로서의 소비

불안 속에서 돈을 쓰는 사람들은 이중의 감옥에 갇혀 있다.

첫째, 양육자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없다.

둘째, 새로운 대상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무의식적 금지다. 누가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움직일 수 없다. 마비된 것처럼.

본능과 억압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진다. 환자는 반항심으로 자신의 감정적 애착이 아닌 금전을 지출한다(보네만, 2023: 115).

"당신들이 내 마음을 통제하니, 나는 최소한 내 지갑은 마음대로 열겠다."

이것이 무의식의 논리다. 유치하게 들리는가? 하지만 무의식은 원래 유치하다. 무의식에는 나이가 없다. 거기엔 영원히 세 살짜리 아이가 살고 있다.

왜 돈 지출이 불안을 일시적으로 덜어주는가?

돈을 쓰는 행위가 감정의 자유로운 흐름을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구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무의식은 잠깐 속는다.

"아, 나는 자유롭게 내 것을 줄 수 있구나. 나는 선택할 수 있구나. 나는 독립적이구나."

하지만 곧 진실이 들이닥친다.

배송된 물건을 뜯어보는 순간, 공허함이 홍수처럼 범람한다. 이것은 내가 진짜 원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묶여 있다. 그러면 다시 불안이 찾아오고, 다시 돈을 쓴다. 끝없는 반복. 쳇바퀴.


과도한 기부자들의 슬픈 비밀

여기서 흥미로운 변주가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소비하는 대신 "기부"한다. 애정을 줄 수 없으니 연민을 주고, 후원자가 되며, 종종 금전을 과도하게 제공한다. 그들은 영원히 이런 형태의 보상적 행위를 반복할 운명이다.

본질적으로 적절한 것을 주지 못한다는 불분명한 감각 속에서, 그들은 그것을 양으로 보충하려 한다. 진짜 사랑을 줄 수 없으니, 대신 많은 돈을 준다. 비싼 선물을 준다. 화려한 파티를 연다.

하지만 받는 사람은 안다.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모임에서 만난 한 사업가가 말했다.

"저는 직원들한테 정말 잘해줘요. 보너스도 많이 주고, 복지도 최고 수준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직원들이 저를 안 따르는 것 같아요. 뭐가 문제일까요?"

그에게 물었다. "직원들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시나요? 그들이 힘들어할 때 눈을 마주치시나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본질은 간단하다. 불안 속에서 돈을 쓰는 사람이든, 사랑 대신 돈을 주는 사람이든, 그들의 금전 사용은 감정적 연결의 대리물이다. 동시에 신경증적 장애에 대한 보루다. 진짜 친밀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어벽.


화장실, 그 은밀한 생산의 공간

돈과 대변의 등식은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변기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한다. "시간 낭비를 막으려고"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곳에 최대한 오래 머물 구실이다. 한 내담자는 상담 시간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가, 집 화장실에서 생각이 솟아나 그걸 다음 세션에 가져왔다.

신경증 환자들에게 화장실은 진정한 "창조"가 일어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거래"를 하는 장소다. 깊이 사색하며 돈을 벌거나 절약하는 장소. 말 그대로 "큰일 보는" 곳.

한 내담자는 화장실 조명 켜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낭비이고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화장지를 극도로 아끼는 사람들도 있다.

무의식은 화장지 구매와 대변을 연결한다. 배설물을 아끼는 것이 금전을 아끼는 것이고, 금전을 아끼는 것이 배설물을 아끼는 것이다. 순환 논리. 하지만 무의식에게는 완벽하게 논리적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지폐를 변기에 버린다

정신병 환자들에게서 이 등식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조증 상태에서는 배설물을 모아 지불 수단으로 제시한다. 진지하게. 반면 우울증 상태에서는 지폐 다발을 가져다가 변기에 버린다. 실제로.

우울증의 핵심은 상실이다. 잃어버린 사랑 대상. 무의식은 그 상실을 신체적으로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대변을 잃는 것과 같다.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우울증 환자는 추방된 사랑 대상을 돈의 형태로 다시 섭취하려 한다.

반대로, 대상의 파괴는 종종 무의식에 의해 배변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를 버리는 것, 관계를 끝내는 것, 사랑을 철회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무의식에서는 배변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신경증 환자가 어질러진 방을 배설물로 가득 찬 내부 공간처럼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정체된 소화기를 비우듯이, 갑자기 방을 정리함으로써 "해방"된다. 평생 축적된 수집품을 처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이 무의식의 언어다.


존재를 증명받지 못한 사람들

이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사람들은 사랑을 돈으로 대체하는가? 왜 진짜 친밀감 대신 금전을 선택하는가?

답은 하나다. 그것이 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무조건적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진짜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 결핍된 것이다. 심장이 멈춘 채로 살라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요구다. 날개 없는 새에게 날아오르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을 선택한다. 돈을. 물건을. 일시적 관계를.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묘한 역설이 있다.

그들의 돈 지출은 실패한 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사랑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쇼핑 중독자의 손에 쥐어진 신용카드는 "나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절규다. 선물 중독자의 과도한 제공은 "나를 사랑해달라"는 무언의 호소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존재 외의 것으로 사랑받으려 한다. 돈으로. 물건으로. 외모로. 성과로.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대리물일 뿐이다. 진짜가 아니다.


치유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가능하다. 하지만 각오해야 한다. 쉽지 않다.

그 여정은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 생후 초기에 형성된 고착으로 내려가는 것을 요구한다. 부모가 어떻게 배변 훈련을 시켰는지, 어떻게 "제공"과 "보유"를 가르쳤는지, 그 순간들을 다시 경험해야 한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이 과정을 돕는다. 환자가 분석가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 자체가 치료의 일부가 된다. 어떻게 주는가, 언제 주는가, 얼마나 주는가. 치료비를 낼 때의 감정, 세션을 취소했을 때의 죄책감, 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불안. 이 모든 것이 환자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한 환자가 분석가에게 치료비를 내는 대신 신체 증상 방귀로 "지불"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의 무의식에게 그 증상은 금전이었고, 금전은 배설물이었고, 배설물은 애정이었다.

분석은 이 등식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천천히. 인내심 있게. 증상을 금전으로, 금전을 배설물로, 배설물을 애정으로 바라보던 무의식을, 애정을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우리 안의 유아

고백한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유아기 고착을 갖고 있다.

돈에 대한 태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인색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관대하다. 어떤 사람은 돈을 더럽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신성시한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어떤 사람은 돈이 있으면 불안해진다.

이 모든 태도는 무의식 속 잔재다.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은 성숙과 미성숙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사랑을 주고, 때로는 돈을 준다. 때로는 존재로 연결되고, 때로는 물건으로 관계 맺는다.

그것도 괜찮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내가 지금 신용카드를 긁는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사려는 것인가? 정말 이 물건이 필요한가, 아니면 불안을 달래려는 것인가? 이 선물은 진짜 사랑의 표현인가, 아니면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인가?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송 알림에 가슴 뛰는 순간. 장바구니를 채우는 새벽. 택배 상자를 뜯는 손끝의 떨림.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의 무의식이 속삭인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나는 묶이지 않고 싶다."

들어라. 그 목소리를.

그것이 진짜 당신이다. 돈으로 위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기를 기다리는 존재 자체. 당신은 물건이 아니다. 당신은 존재다. 사랑받아야 할, 사랑할 수 있는,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

그게 전부다. 그게 답이다.


어니스트 보네만/ 이천영외 역(2023). 돈의 정신분석. 현대정신분석연구소.

keyword
이전 01화친구가 당신 걱정할 때 진짜 걱정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