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반복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고민할 때였다. 오래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통화할 때마다 똑같은 말을 했다. "조금만 더 버텨"
, "정년까지 충분히 다닐 수 있어".
처음엔 고마웠다. 친구가 나를 걱정해주는구나.
그런데 이상했다.
통화를 거듭할수록 이 말이 내 얘기가 아니라 친구 자기 얘기 같았다. 대화 중간중간 와이프 병원비 걱정이 나오고, 늦둥이 아들 키워야 하는 부담이 나오고, 정년까지 다녀야 한다는 압박이 나왔다.
왜 친구는 나를 걱정하면서 자기 얘기를 할까? 명확히 해두자.
친구는 나를 걱정한 게 아니었다. 친구는 자기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 걱정을 내 입에 옮겨놓았을 뿐이다.
그때 깨달았다. 친구는 나를 위로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게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치'다. 그리고 이건 우리 모두가 매일 하는 일이다.
대화의 배관공사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할 때 겉으로 드러난 내용을 그대로 믿지 말라고 했다. 꿈에서 집의 배관이 고장 났다면, 그건 정말 배관 걱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말하기 두려운 것을 다른 이미지로 바꿔 보여준다. 이걸 '전치(displacement)'라고 한다.
정신분석가 알레산드라 렘마는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명시적 꿈은 집의 배관 문제에 관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그 개인의 신체적 건강에 대한 더 깊은 불안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렘마, 2022: 327)
'내 몸이 망가지고 있어'라는 두려움은 너무 무섭다. 그래서 무의식이 그 공포를 '집의 배관'으로 옮겨놓는다. 집 걱정은 할 수 있지만, 죽음의 공포는 직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거다. 이 원리가 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도 똑같이 작동한다. 아니,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내 친구를 다시 보자.
친구는 '나는 회사에서 정년까지 버텨야 해. 와이프 병원비 때문에, 늦둥이 아들 때문에, 나는 그만둘 수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하기 두려웠다. 이 문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이 불안을 자기 자신에게 직면하는 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래서 무의식이 작동했다. 친구는 이 무거운 짐을 나에게 옮겼다. 당시 나의 이직 고민이라는 안전한 무대 위에 자기 불안을 올려놓은 것이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내 손에 던진 격이다.
결과는? "넌 버텨야 해"라는 말이 반복됐다.
하지만 그 "넌"은 사실 "나"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꿈의 전치가, 친구의 대화 속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더 이상한 건 이거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듣으면서 뭔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내 얘기가 아니라 친구 자기 얘기 같아"라고 직감했다. 이 직감은 정확했다. 나는 친구 말의 '하부텍스트'를 읽어낸 것이다.
조목조목 짚어보자.
친구는 나를 걱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걱정의 내용을 들어보면 전부 친구 자신의 상황이다. 와이프 병원비, 늦둥이 아들, 정년까지의 책임. 이게 내 걱정인가, 친구의 걱정인가?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할 때 두 가지를 구분했다. 꿈속에서 실제로 본 것(명시적 내용)과, 그 꿈이 진짜 말하려는 것(잠재적 내용). 예를 들어 꿈에서 기차를 놓쳤다면, 겉으로는 기차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인생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후회일 수 있다.
렘마는 이 원리가 대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프로이트에게서 의사소통의 '수준'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꿈을 이해하는 비결은 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꿈의 하부텍스트, 즉 잠재적 내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명시적 내용에 머무르지 말 것을 촉구했다." (렘마, 2022: 326-327)
다시 말해, 대화에도 두 개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표면만 보고 속지 말아야 한다.
명시적 내용: 친구가 실제로 말하는 것 ("넌 조금만 더 버텨")
잠재적 내용: 친구가 정말 전달하고 싶은 것 ("나는 버텨야 해")
문제는 친구 자신도 이걸 모른다는 거다. 친구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무의식은 다른 각본을 쓰고 있다.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그 말의 진짜 목적지는 친구 자신이다.
이게 전치의 기묘함이다. 아니, 전치의 잔인함이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만, 왜 그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듣는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말하기 어렵다. 둘 다 혼란스럽다. 둘 다 불편하다. 하지만 대화는 계속된다.
통화가 반복되는 이유
여기서 핵심 질문이 나온다.
왜 통화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할까?
답은 간단하다. 친구가 아직 자기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와의 통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 '나는 버틸 수 있어. 정년까지 다닐 수 있어. 이건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설득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다음 통화에서 또 반복한다. 또 안 된다. 또 반복한다.
이건 마치 고장 난 녹음기 같다. 친구는 같은 메시지를 계속 틀지만, 정작 그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할 사람—친구 자신—은 제대로 듣지 못한다. 왜? 그 메시지가 '나'라는 우회로를 거쳐서 오기 때문이다.
압축과 전치의 마술
더 깊이 들어가보자.
친구의 말 속에는 여러 사람이 압축되어 있다. 와이프, 늦둥이 아들, 친구 자신, 그리고 나. 이 네 사람의 이야기가 한 통의 전화 속에서 뒤섞인다.
와이프의 병치례 = 경제적 부담
늦둥이 아들 = 장기적 책임
친구 자신 = 도망칠 수 없는 현실
나 = 안전한 투사 대상
프로이트는 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꿈속의 한 인물이 실제로는 여러 사람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사람이 실은 상사도 되고 선생님도 되는 식이다. 이를 '압축(condens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복잡한 감정을 다른 대상으로 옮기는 것을 '전치(displacement)'라고 한다.
렘마는 이 원리가 일상의 대화에도 작동한다고 말한다.
"압축, 전치, 상징화의 과정은 환자가 제시하는 모든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작용한다. 환자가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여러 명의 중요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나타낼 수 있다." (렘마, 2022: 328)
친구는 이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를 나라는 단순한 형태로 압축했다. 그리고 "넌 버텨야 해"라는 한 문장으로 전치했다.
이게 무의식의 놀라운 경제성이다. 친구는 자기 삶의 모든 무게를 한 문장에 담아, 나에게 전달한다. 내가 그 무게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건 원래 친구 것이니까.
말의 무게가 다른 이유
내가 느낀 또 하나.
친구 말에는 이상한 절박함이 있다.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뭔가 필사적인 설득처럼 들린다. 맞다. 친구는 필사적이다. 하지만 설득하려는 대상이 잘못됐다.
친구가 설득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친구 자신이다.
이게 전치된 대화의 특징이다. 말의 무게와 방향이 어긋난다. 겉으로는 나를 향하지만, 내면의 힘은 다른 곳을 향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묘한 부담을 느꼈다. 친구의 불안이 전화선을 타고 내게 쏟아졌다. 그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건 내 짐이 아니었다. 친구의 짐이었다.
명확히 해두자. 이건 내가 떠안아야 할 몫이 아니었다. 친구의 불안은 친구가 직면해야 할 몫이다. 내가 대신 버텨준다고 해서 친구의 불안이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치는 더 깊어지고, 우회로는 더 길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짐을 대신 져서는 안 된다. 그건 연민이 아니라 공모다.
침묵이 말해주는 것
흥미로운 건 친구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친구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회사 그만두고 싶은데 못 그만둬. 와이프 병원비도 있고, 아들도 키워야 하고..."
이 말이 나오면 대화는 달라진다. 친구가 자기 불안을 직면하는 순간, 전치는 사라진다. 하지만 친구는 이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한다.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야기로 우회했다. 당시 나의 이직 고민이라는 안전한 주제로 자기 불안을 포장한 것이다. 이게 방어다. 무의식의 생존 전략이다.
일상의 분석가 되기
이제 핵심으로 가자.
일상의 대화에서 우리는 모두 분석가가 되어야 한다.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타인의 전치된 불안을 떠안으며 살게 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세 가지만 물어보면 된다.
1.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시적 내용)
2. 이 사람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잠재적 내용)
3. 왜 지금, 나에게, 이 말을 하는가? (전치의 실마리)
내 친구의 경우를 다시 보자:
친구가 말하는 것: "넌 버텨야 해"
친구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 "나는 버텨야 해"
왜 지금, 나에게: 친구가 자기 불안을 직면하기 너무 무서워서
이 세 질문만 품고 있어도, 우리는 대화의 하부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질문들을 습관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상대를 진짜로 돕기 위해서.
무의식의 신호들
전치를 알아채는 신호들이 있다.
같은 말의 반복: 해결되지 않은 자기 불안
조언의 절박함: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시도
듣는 사람의 불편함: 타인의 짐을 떠맡은 느낌
문맥의 어긋남: 말의 내용과 상황이 안 맞음
감정의 과잉: 상황에 비해 지나친 강도
내 친구는 이 다섯 가지를 모두 보여줬다. 그래서 내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상담실에서 일어난 전치
렘마는 실제 상담 사례로 전치의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톰이라는 남성이 1년간 심리치료를 받았다. 이제 마지막 두 번의 회기만 남았다. 종결이 임박한 날, 톰은 부모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이 저를 돌봐주지 않아요. 제가 사는 곳에 자주 방문도 안 하고요. 요리사인 형을 만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는 분노했다. 버려진 느낌, 편애당하는 형, 방치되는 자신. 그러다 갑자기 침묵했다. 슬픈 표정으로 발을 내려다보았다.
"나한테서 나쁜 냄새가 나요. 아무도 나랑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상담사는 듣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부모 이야기가 아니었다. 톰은 '상담을 끝내는 상담사'에 대한 분노를 '자주 찾아오지 않는 부모'로 전치시킨 것이다.
상담사가 치료를 종결하려 한다. 톰의 환상 속에서 상담사는 '냄새나지 않고 더 나은' 다른 환자를 선호한다. 그래서 자신을 버린다. 이 견디기 힘든 분노와 상실감을, 톰은 안전한 대상—부모—에게 옮겨놓은 것이다. (렘마, 2022: 342-343)
이게 전치의 실제 모습이다. 말은 부모를 향하지만, 감정은 상담사를 향한다.
말이 가야 할 곳
본질로 들어가자.
친구의 말은 지금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다. 아니, 도망가고 있다. 나에게 오는 말은 친구 자신에게 가야 한다.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정말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까? 이게 나에게 가능한 일일까?"
이 질문들이 친구 안에서 울려야 한다. 내 귀가 아니라 친구의 가슴에서. 그래야 친구는 자기 불안을 직면할 수 있다. 그래야 진짜 위로가 시작된다.
여기 역설이 있다.
친구가 나를 통해 위로받으려 할수록, 친구는 더 위로받지 못한다. 말이 제자리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우회할수록 목적지는 멀어진다.
하지만 그때 친구는 그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나의 이직 고민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이게 전치의 비극이다. 말은 계속 돌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건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 이런 우회로를 만들고, 그 길에서 헤맨다.
듣는 사람의 역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답이 보인다.
첫째, 내가 느낀 게 맞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 이게 친구 자기 얘기라는 내 직감은 정확했다. 우리는 자신의 직감을 믿어야 한다. 몸이 먼저 안다.
둘째, 친구의 투사를 떠맡지 않는 것. "넌 버텨야 해"라는 말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건 친구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전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셋째, 기회가 되면 친구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혹시 너 요즘 힘들어? 회사 일 때문에 고민 있어?"
이 질문 하나가 친구의 말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회로에서 본래 길로.
그리고 이건 친절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직의 문제다. 전치된 대화에 동참하는 건 친구를 돕는 게 아니라, 친구의 도피를 돕는 것이다.
우회의 종착역
전치는 우회로다.
직접 가기 무서워서 돌아가는 길이다. 친구는 자기 불안을 직면하기 무서워서 나를 통해 우회했다. 하지만 우회로는 결국 막힌다.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진짜 목적지는 친구 자신이었다.
친구가 "나는 버텨야 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회가 끝난다. 그때 친구는 자기 불안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 전치된 대화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길을 찾았다. 이제 친구도 자기 길을 찾아야 할 차례다.
말의 진짜 주인
마지막으로 이것만 기억하자.
대화에서 가장 절박한 말은 종종 말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말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강하게 조언할 때, 반드시 물어보라. "이 사람이 정말 설득하려는 건 누구일까?"
답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다. 거의 예외가 없다.
친구가 "넌 버텨야 해"라고 말할 때, 친구는 사실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버틸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 나는 괜찮아."
이게 전치의 진실이다. 말은 돌아가지만, 주인은 하나다. 말은 우회하지만, 목적지는 하나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우리는 타인의 전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우회로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이 그들을 본래의 길로 돌려놓는다. 그 질문이 말을 제자리로 보낸다.
우리는 모두 무의식의 우회로 속에 산다. 하지만 그 길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길에 갇히지 않는다. 말의 표면이 아니라 말의 방향을 보는 것. 그게 일상 속 분석가가 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알레산드라 렘마/ 이재훈외 역(2022). 정신분석 심리치료. 현대정신분석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