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배우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경청'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고, "아, 그렇군요"를 적절히 섞어가며.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 듣기는 끝났다. 경청 기술을 의식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상대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경청 연기'에 빠져있다.
의식의 함정
내가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목격하는 실패가 바로 이거다.
"공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감은 사라진다. "이해해야지"라고 마음먹는 순간, 이해의 문은 닫힌다. 왜? 당신이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의식의 채널이 꺼지기 때문이다.
무의식? 쉽게 말하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영역이다. 빙산으로 치면 물 아래 잠긴 90%의 부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겨우 10%에 불과하다. 진짜 중요한 건 그 90%에서 일어난다.
한 초보 상담자가 있었다. 열심히 노트를 적으며 내담자의 말을 '기록'했다. 고개도 열심히 끄덕였다. 눈도 따뜻하게 맞췄다. 교과서적인 경청의 자세였다. 그런데 상담이 끝나고 그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분명 다 들었는데 왜 내담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까요?"
당연한 거다.
그는 듣고 있던 게 아니라 '듣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으니까. 의식이 '경청 체크리스트'를 돌리느라 바빴으니까. 무의식은 이미 문을 닫았고, 진짜 대화는 시작도 안 했던 거다.
무의식적 듣기의 진실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다. 비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식을 무의식하라"고 했다. 복잡하게 들리는가?
간단히 말하면 이거다. 머리로 듣지 말고 가슴으로 들으라.
진짜 듣기는 이렇게 일어난다. 내담자가 이혼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당신 머릿속에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싸우던 장면이 떠오른다. 내담자가 직장 스트레스를 토로하는데 당신은 문득 답답해서 창문을 열고 싶어진다. 내담자가 성공담을 늘어놓는데 당신은 졸음이 쏟아진다.
대부분의 상담자는 이런 반응을 '실수'라고 생각한다.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자책한다.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그게 바로 듣기다. 진짜 듣기다. 당신의 무의식이 상대의 무의식을 포착한 순간이다. 내담자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당신이 몸으로, 감정으로, 이미지로 받아낸 거다.
한 내담자는 평온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제 다 정리됐어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이유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내담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좋은 딸"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슬픔만 허용하고 분노는 억눌렀던 거다.
내가 대신 느낀 거다. 그의 무의식이 내게 전달한 거다.
역전이라는 레이더
상담 중에 느껴지는 모든 감정,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 몸의 모든 반응. 이것들은 잡음이 아니다.
신호다. 정확한 신호.
내담자가 "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데 당신이 갑자기 숨이 막힌다면? 그 '괜찮음'이 가짜라는 신호다. 내담자가 침착하게 이야기하는데 당신 다리가 떨린다면? 그 침착함 아래 숨겨진 공포를 당신이 감지한 거다.
이걸 정신분석에서는 '역전이'라고 부른다.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란 뭘까? 쉽게 말하면,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프로이트가 처음 발견했을 때는 치료의 방해물로 여겨졌다. 상담자의 미해결 문제가 튀어나오는 걸림돌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