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ng Home Again
/Chang-rae Lee
Sometimes you would hear her halt after only a few steps, to catch her breath or steady her balance, and whatever you were doing was instantly suspend by a pall of silence.
가끔 몇 걸음을 걷고 난 후 그녀가 숨을 고르거나 균형을 잡기 위해 멈추면 하던 일을 즉시 멈추게 되고 정적의 장막에 덮이곤 했다.
화자는 요리와 어머니를 화두에 올린다. 화자 자신이 나이가 들어 죽음이 임박한 어머니에게 돌아와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돌이켜보는 시간들, 요리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평화롭던 어린 시절, 혹은 이민자로서 이국어가 서툰 어머니에게 몹시도 무례했던 날의 뼈아픈 기억, 집을 떠나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에서 지내며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회상한다.
또한 어머니의 시각으로 어린 자식을 기숙학교에 홀로 두고 오던 그녀를 돌이켜 보기도 한다. 그때는 절대로 닿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로서 자식을 너무 이르게 내보낸 것이 너무 큰 실수였다고, 그러나 행여 부족한 뒷바라지로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식이 될까 봐 그래야 했노라 던 어머니의 고백은 부모의 사랑이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다가온다. 자식으로서는 그 깊이까지는 끝내 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내 인생의 깊이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지.
화자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지난날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고백한다. ‘사실’은 힘이 있다. 작가가 스스로 보여주는 사실의 기록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고백에 공감하게 하고 독자들 역시 다르지 않음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한다.
우리에게 사춘기는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온다.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해보지도 못했는데 사춘기는 불쑥 얼굴을 내밀어 삶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질풍노도와 같이 격렬하게 함으로써 모든 것에 무례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는다. 삶과 미래에 대하여 두렵게 만들고 그 두려움의 비수를 휘둘러 주변 사람들, 그중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뼈아프게 될 기억을 남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도 넉넉하게 남을 품이 있는 사람이기에 너무 쉬웠던 사람, 바로 어머니. 그러나 그 사랑이 가장 상처받기 쉬웠음을 깨닫게 될 때면 그때는 또 너무 늦다. 그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하기엔 너무 늙어 버린 어머니.
그러나 짧게라도 어머니의 온 삶이 나의 예민한 촉수로 느껴지는 날, 그의 가엾은 호흡이 내 삶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을 때 느껴지는 교감의 경험이 나를 또다시 살아가게 한다. 사랑받은 자의 기억으로 그토록 지극한 헌신의 대상이 되었음에 아픔과도 같은 충만함을 느낀다.
Shooting an Elephant
/George Orwell
And afterwards I was very glad that the coolie had been killed; it put me legally in the right and it gave me a sufficient pretext for shooting the elephant. I often wondered whether any of the others grasped that I had done it solely to avoid looking a fool.
그 후 나는 그 노동자가 이미 죽어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것이 나를 법적으로 옳게 해 주었고 코끼리를 쏜 행위에 대한 충분한 변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단지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차리지 않았는지 생각하곤 했다.
식민지배의 가해자 입장에 있는 화자는 자신이 원주민들의 미움의 표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그들의 적개심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삶을 불편하게 한다. 경찰관으로서 공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만 상대가 수용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당성에 치명적인 오류로 남는다. 일방적인 권위, 그것의 실체는 폭압이다.
난동을 부리는 코끼리, 그것은 치안에 위해를 가하고 있으니 경찰관이 처리해야 할 당연한 임무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로 처리하면 되는 일상적인 업무상황에서조차 화자는 주변적인 것에 중심을 빼앗긴다. 코끼리가 위험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지켜보는 원주민들의 시선, 그들의 평가, 그것 때문에 그는 코끼리를 쏠 수밖에 없다. 원주민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기에, 그런 이유로 코끼리를 쏘아야 함을 또다시 확인한다. 화자는 말한다. 사실은 쏘고 싶지 않았다고. 바보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쏜 거라고. 그는 자신에 부합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이 글은 화자의 미세한 심리를 묘사한다. 1인칭 시점의 화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주변상황을 설명한다. 이런 화법을 사용함으로써 화자의 내면을 직관하게 되고 독자는 최종적으로 숙고해야 할 제국주의라는 화두에 직면하게 된다. 식민지배로 실현되는 제국주의의 가해자 입장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과 불편함은 그 역시 또 다른 피해자임을 보게 된다. 수동적 입장의 가해자는 결국 거대권력의 피해자일 뿐이다.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할 때, 너무 큰 옷 속에 감춰진 자신의 실체와의 괴리는 무안함이고 불편함이며 끝없는 자괴감의 원천이다. 이미 사람들에게 인식된 모습이 자신의 정체성과 혹은 자긍심에 실제로 부합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사람의 인생과 정신에 어두운 그늘로 남는다. 하는 일에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