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초록하게 거기서 모해?"
신기한 식물일기 (1)
by going solo Jan 20. 2023
‘신기한 식물일기’를 읽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글/레나 안데르손 그림/ 김석희 옮김,
미래사, 2000. 12. 30.
“푸르고 싶어 죽을 똥을 싸고 있다.”
한겨울 혹한 속 식물을 주의 깊게 본 적이 있는가. 죽은 듯 삭막한 가지 끝에 달린 보잘것없는 ‘눈’, 그것이 겨울이라는 시간을 건너가는 식물의 방식이다. 그토록 작은 것에 한없이 드라마틱한 시간이 담겨있다. 운동 삼아 걷는 중량천변에 무리 지어 웅크리고 있는 버들가지의 눈들이 매일매일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그것들의 계절을 동행한다. 보슬거리는 솜털을 뒤집어쓴 껍질이 열리는 날에 반드시 다른 계절이 올 것이니.
“여기서 시간을 담고 있다.”
가로수로 심겨진 벚꽃나무에 가지마다 해바라기 씨만 한 눈이 달려있다. 어찌 알았을까, 그것들이 부풀어 오르면 바람이 품은 냉기가 가라앉고 햇살에 온기도 더해진다. 봄이다. 얇은 막을 비집고 초록색이 도드라진다. 때가 되었다는 듯 푸른 생명이 거침없다.
분출하는 함성처럼 흐드러지던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콩알 만 한 열매가 달려있다. 그것은 결국 검은빛으로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고 한동안 보도는 검은 파편 같은 자국들이 단내를 풍길 것이다.
전성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또다시 그것들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자동차 후면경에 비친 거리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벚나무들이 붉은색 잎을 뒤집어쓰고 비를 맞고 있다. 왔던 계절로 돌아가려고 잎을 내려놓고 있다. 그 모든 시간 나의 거리에 존재하는 가로수, 지난한 시간을 한 결 같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간을 보듬어 아름다운 시간을 선사한다.
“빨갛고 있다, 차별도 한다, 남쪽 하늘을 보고파한다.”
도청 본관 입구, 시멘트색의 말끔한 공간에 커다란 화분 속 듬뿍 심겨진 베고니아가 뜨거운 여름날 타오르듯 피어있으면 잠깐이라도 마음이 달뜬다. 너무도 인위적인 색깔의 그 공간에서 그토록 붉은색의 도발이라니.
혹은 호텔로비에 서있는 거대한 야자수 두세 그루, 그곳에 그런 나무를 배치한 담당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회전문을 돌아 들어온 ‘이곳은 방금 전 그곳과는 다릅니다’, 여기는 당신의 일상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차별하려는 거겠지. 넌지시 가져다 놓은 식물의 배치는 생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분절한다.
근사한 한식당, 뒤뜰로 열린 장지문 옆에 남천(南天)이 서있다. 여리여리한 잎사귀마다 고즈넉한 뒤뜰의 하늘을 담아 아련하다. 아직은 푸르지만 가을이 되면 저 공간에서 남쪽 하늘의 석양처럼 붉게 물들 것이다. 오늘이랑은 다른 색깔로 하늘을 품을 것이다. 매일 다른 하늘을 조금씩 달라지는 잎의 색깔로 담아 하루도 같지 않은 이 공간과 시간의 어우러짐을 보여줄 것이다. 저 나무 한 그루가.
“그냥 사는 걸 하고 있다, 존재 자체가 위로 이므로,”
내가 있는 모든 곳에 식물이 있다. 직장 책상 높은 곳에 물에 담긴 스킨답서스가 달랑 한 줄기 넝쿨을 늘어뜨리고 있다.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그중 하나 잘라다 흔해빠진 플라스틱 투명 컵에 담갔다. 외줄기로 늘어진 초록이 싱그럽다. 뿌리가 나오고 연초록 잎을 하나씩 피울 때마다 반갑고 대견하다. 자주 가는 식당 수족관에 떼 지어 다니던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얻어다 넣어봤다. 금세 죽어 버리겠지, 별 기대 없었는데 꽤나 꿋꿋이 살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신기해한다. 보잘것없는 두 개의 작은 생명체들이 나름 어울려 사는 모습이 뿌듯하다.
안방 협탁에 제비란 몇 포기가 찻잔에 담겨있다. 다니는 세탁소에서 얻어다 물에 담갔는데 스탠드를 켜면 노란 불빛에 연초록빛이 더할 나위 없이 곱다.
작은 아이 컴퓨터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선인장도 맘에 든다. 선인장이 전자파를 차단해 준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고 그 자리에서 초록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좋다.
발코니 검은 플라스틱 화분에 대파가 한 무더기 자라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잘라먹는데 어김없이 또 나온다. 처음엔 노란색이었다가 결국 초록의 대파로 자란다.
나의 공간에 내가 애정하는 것들, 보잘것없지만 초록의 생명체로 그것들의 살아있음과 자라남을 지켜보는 것, 나는 그걸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