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땅히 그래야 한다."

D. H. Lawrence의 에세이 'Adolf'를 읽고

by going solo

어느 이른 아침 인간에게 잡혀와 인간의 집에서 살던 어린 토끼가 부적응하여 결국 숲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원작의 짧은 이야기가 끝납니다. 뒤이어 숲으로 돌아온 토끼가 인간과 동거했던 시간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꾸며 봅니다.


'거기도 괜찮았다.'


서걱서걱,

무언가 여린 풀을 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든 재빨리 숨어야 돼!' 엄마는 늘 그러셨는데. 그날은 불길한 그 소리보다 꼼짝도 하지 않는 엄마와 형제들을 감싸고 있는 고요함이 더 무서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중에 사람들이 제일 사악하다고, 그것들은 예의도 없이 아무 때나 들어와 함부로 풀을 밟고 풀 숲을 헤치고 마음에 들면 무엇이든 제 것인 양 가져가 버린다고, '너처럼 작고 예쁜 것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그러니 엄마 말 명심해!' 그 소리가 사람에게서 나는 거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 어둡고 깊은 풀숲으로 숨으라더니. 그날은 너무 어려 죽음이 그런 거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생명이 제 몸을 떠나면 그토록 섬뜩한 정적만 남는다는 것을.

결국 소리는 내 머리맡에서 멈췄고 나는 커다랗고 새까만 것에 깔려 납작하게 짓눌려 있는 풀을 보았다. 나는 그날 사람에게 잡혔다.


앤디네 집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란으로 가득했다. 뒤숭숭한 소리가 한데 엉켜 동굴 속에 잇는 것 같았다. 이때쯤 숲에서는 어린 새들이 전해줄 소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목청껏 지저귀고 있을 텐데, 그 소리에 실려 오는 아침 햇살은 얼마나 반가운 지. 사람이라는 동물이 사는 그곳은 냄새도 고약했다. 풀냄새 묻어 있는 바람도 한 점 불지 않았다. 게다가 발바닥에 느껴지던 미끈함이라니! 폭신한 풀 한 포기도 없이 미끄덩하기만 한 그곳, 앤디네 집은 어디나 그랬다. 불편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창가에 늘어져 있던 천 조각은 마치 덤불처럼 나를 숨겨주었고 어지럽게 휘감기는 그것에 몰두할 때면 마치 숲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그들이 먹으라고 주던 축축한 것, 사실 엄마 젖 같기도 한 그것은 맛이 괜찮았다. 점점 맛있다고 느껴질 때쯤 사람들의 소란에도 익숙해졌다. 그날 풀 숲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온 아서의 검은 발자국 소리와 거친 말들, 리디아의 불친절한 소리엔 언제나 화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앤디와 그 형제들의 조심스런 목소리는 그곳이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들은 나에게 무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앤디네 가족은 내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잘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내 목덜미를 잡고 주물럭거릴 때 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선가 "아돌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귀가 꼿꼿이 서고 고개를 돌려 이미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밖으로 나가는 리디아의 꽁무니에 문이 빼꼼히 열려있었다. 그 틈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햇살이 길게 드러누웠고 바람도 따라 들어왔다. 숲에서 언제나 어디서든 설렁거리던 그 바람에 풀냄새가 묻어 있었다. 나는 문틈 너머에 있는 세상을 향해 폴짝거렸다. 나의 후각을 깨운 냄새를 거슬러 그 풀이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이런 냄새를 풍기는 그 풀 맛은 어떨까. "야, 아돌프!, 맨날 똥을 아무 데나 싸, 또 밟았잖아!" 무례한 아서.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직은 어렸지만 그래도 햇살과 바람, 풀냄새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으므로. "안 돼, 아돌프. 아직은 밖에 나가면 너무 위험해. 이 동네 사나운 고양이가 있어. 그 녀석에게 걸리면 큰일 나." 처음 잡혀 오던 날 나를 집어 올리던 그 손길이 생각났다. 이번에 주머니에 넣는 대신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접시에 우유를 따라주었다. 그의 손길은 언제나 의외로 다정했다. "왜? 지금은 배불러? 그럼 이따가 먹어." 화가 나면 배도 부르나, 맛도 없어지나. 그날부터 화는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우유도 맛있게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오늘 나로 살고 있다.'


사각, 사각,

저건 담비가 내는 소리다. 그것의 예민한 후각이 내가 여기에 존재함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나를 잡아먹을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저런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의도를 알고 있으니. 나의 튼튼하고 길쭉한 뒷다리로 땅을 박차 언덕을 내달려 올라가면 그것은 결국 나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숲의 모든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 무엇이 어떤 소리는 내는지, 불길한 소리인지,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이 숲에서 나는 축복처럼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제일 좋다. 그건 귀로 맡는 꽃향기랄까. 그리고 천둥소리, 칼날처럼 예리한 번갯불이 내리 꽂히면 어김없이 뒤따라오는 천둥은'널 잡아먹을 거야!' 협박처럼 들리지만, 음, 그건 그냥 무시해도 된다. 너무 커서 좀 깜짝 놀랄 때가 많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것이니.


숲으로 돌아온 후,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을 때쯤 몇 번인가 덤불숲 어둔 그늘 속에서 아서의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작은 틈으로 그의 검을 신을 보기도 했다. "아돌프, 아돌프!"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여전히 내 귀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의 눈을 보기 위해 달려 나가진 않았다. 그날, 앤디네 집 문틈으로 햇살과 바람과 풀냄새가 함께 나에게로 왔던 그날 이후, 내 마음에는 화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졌고 앤디네 가족을 불편하게 했다. 리디아의 커튼을 떨어뜨렸고 그녀가 사랑하는 꽃을 망가뜨렸고 나는 그들에게 무례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앤디의 눈빛에도 어두운 그늘이 늘었다. 그러나 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토끼이므로, 토끼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토끼로 되었다. 결국 나는 아서의 품에 담겨 숲으로 돌아왔다.


담비, 아주 가까운 곳에 그것이 있다. 나를 노리고,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있다. 그것의 강렬한 허기가 느껴진다. 오싹하게 털이 솟는다. 이제는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뒷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로 달릴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달린다. 묵직한 바람이 나를 향해 달려 내려온다. 오늘도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나를 따라오는 저것도 나처럼 달리고 있을 것이다. 살고자, 살려고. 존재를 압도하는 허기에 이끌려 나를 스쳐간 바람에 맞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것으로 살고 있듯 나는 오늘 나로 살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