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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사람 노릇, 아이 사람 노릇

박완서 님의 어른 노릇 사람 노릇(2009, 작가정신)을 읽고

by going solo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기똥풀꽃. 느즈막한 봄부터 여름이 다 가도록 양지바른 어디 흙 한 줌에도 그 틈을 비집어 샛노란 꽃을 피우는 풀. 가지가 꺾이면 이제 막 나와 세상에 적응하느라 온 힘 다하는 갓난아기의 똥처럼 묽고 맑은 노란색 물을 싸는 보잘것 도 없는 작은 꽃이다. 그러니 귀하다. 보잘것없어서 더 눈에 밟힌다. 나이 먹으니 그리 된다. 흔해 빠져서 눈길 한번 안 주던 것에 새삼스레 마음이 쓰인다. 박완서 님의 『어른 노릇 사람 노릇』이 그러하다. 늙어보니 더 마음이 쓰이는 것들, 작은 것, 값싼 것, 흔한 것, 이미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큼직한 활자로 태어난 작가의 글에 귀 기울여 다 듣고 나면 난 나의 말을 하리라. 그중에 흔해빠진 시간에 대하여. 사람인 나에게 시간은 무엇이었으며 형체도 없이 나에게 왔다 간 그것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나의 노릇을 알게 해 준 시간이여.

이제 나도 마음에 간직했던 말, 마음 가는 대로 한번 써보자. 그 끝에서 태어난 나의 활자여 누구에게라도 가 닿아 고요한 울림이 되거라.



어른 사람 노릇, 아이 사람 노릇

늙어서야 제대로 알아 진 것이 있다. 바람은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거 기압골이 어쩌고 저쩌고, 일기도가 이러니 저러니 그걸로 가 아니고. 그냥 바람으로 알아 진다. 그래 이런 바람이 불 때가 됐지. 저절로 알아 지는 이치, 그게 시간을 오래 겪은 어른이 된 사람 노릇이려나.


계절의 출발지에서 바람이 먼저 길을 나선다. 그것은 계절의 사령이 되어 그 길을 낸다. 삭풍의 땅을 뒤로하고 흙먼지바람의 길을 따라 우리에게 오는 봄, 그것은 우리 곁에서 햇살에 온기를 담아 축축하게 땅을 깨우고 나무를 긴 잠에서 일으켜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정열의 대륙을 향해 오는 가을. 뜨거운 바다를 휘감아 태풍이 되어 열기를 걷어내면 울긋불긋 봄꽃보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단풍의 계절이다.

그저 오고 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에도 어김없는 때와 길이 있다는 것, 나의 지나간 모든 시절 또한 오고 가는 시간의 길 위에 있었음을 쉰쯤 넘어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도 그 흐름의 방식이 따로 있음을 알았다. 태고 적부터 의미도, 무게감도 없이 떨어지던 물방울 하나가 시간의 길에 들어서면 바위를 뚫고 대지에 길을 열어 물길이 되어 흐르나니.


아득한 영겁의 흐름 속에 ‘삶’이라 명명된 내 인생의 속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람됨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시간이 얼마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허겁지겁 쫓기만 하던 열스물서른마흔, 그리고 쉰. 얼마 안 남은 줄 알고, 금방 다 가버릴 것이니 서둘러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언제나 힘껏 달려왔는데, 기약도 없고 끝도 없이 점점 더 내쳐 달리는 그것을 쫓기에 더는 힘에 부쳐 나도 그럴 테니 제 갈길 가라고 그냥 주저앉았는데. 별안간 그것도 멎는다. 뒤돌아 나에게 제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 빨리 뛸 필요 없었다 한다. 그렇게까지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고 한다. 내가 하도 다그쳐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굽이굽이 흐르다 제 곳에 이르는 물처럼 스스로 길을 내 나에게 오는 것이니, 차라리 느린 것이, 아니면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는데 그 많은 시간 다 그리 보내고 이제야 알았으니. 그렇게 내쳐 달릴 때는 얼마 없어 보이던 나의 시간, 그래서 성급했고 무서웠는데 그런데 아직도 꽤 많이 남았다. 사실은 넉넉하게 남아있다. 이제라도 사람답게 익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비로소 시간의 길에 들어 함께 간다. 봄이면 봄이라서, 여름 더위는 그래야 하는 것이고, 가을과 겨울 느릿느릿 누리는 나의 삶. 세상을 향해 순해진다. 사람을 보는 품도 넉넉해진다. 나도 모르게 눈매와 마음 씀이 너그러워진다. 안타깝기만 했던 지난날을 고요히 돌아볼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어른이 된 사람 노릇인가.



Y ,

그렇게 내 달려온 길 뒤돌아보니 거기 서른을 코앞에 둔 Y.

내가 그랬듯 잰걸음에 복받치는 숨을 턱에 매달고 달려오고 있다. 그럴 것이다. 급히 가야 한다 생각할 것이다. 쏜살처럼 스쳐가는 너의 시간이 야속할 것이다. 그토록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아 허탈할 것이다. 그러니 더 집중해서 달려야 한다고 그리 다짐할 것이다. 아니다, 얘야.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더구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예순을 바라보는 내게도 남은 시간이 이만큼이나 푸짐한데 하물며 네게 남은 것은 영겁만큼은 될 것이다.

그러니 급히 오지 마라 아가야.

서두르지 마라.

조바심치지 말고 그냥 잠시 거기 그 자리에 앉아 봐. 숨을 고르며 그냥 있어봐. 가던 길 스스로 돌이켜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너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한번 바라보렴.

고요히.

그토록 소란스럽던 너의 삶이 고요해질 것이다. 지금껏 안타깝게 뒷모습만 따라 쫓아갔던 너에게 시간이 제 얼굴을 보여줄 것이야. 직면하는 인생. 고귀한 너의 삶. 그러고 나면 너의 삶은 더욱 깊어질 것이야. 사람다움으로 충만해질 것이니. 사람은 그리 살아야 해.



S,

그리고 그 뒤로 스물을 겨우 넘어온 S,

푸르디푸른 청춘 이건만.

알아. 두렵겠지. 그것이 아직은 섣부른 너의 노릇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고 잘할 수 있는 것은 더더구나 없이 이리 살다 보면 사람 노릇 할 수 있을까. 혹시 어디에선가 떨어져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네 마음 깊은 곳에 불길하게 도사리고 있는 불안함을 내 것인 듯 알고도 안다.

사실 그 불안함과 불안정함이 스물의 날들을 살고 있는 너의 온전한 몫이기도 해. 다만 하루가 아까운 이팔청춘인데 성공하고 싶어서 남들만큼 번듯하게 살고 싶어서 노력하려는, 열심히 해보고자 하는 너에게 목청껏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리 살지 못했지만 부디 너는 다른 길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니.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려고 열심히 살지 마라.

부디 행복하려고 노력해.

온전한 너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너의 모든 시간에 마음 들이며 살거라.

나 또한 남은 인생 그리 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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