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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May 12. 2023

정식과 오식의 차이

사람들 눈치 같은 건 보지 않는다. 씰룩샐룩 움직이는 엉덩이를 계속 쳐다본다. 나이트클럽 방불케 하는 조명 아래에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골반을 최대한 좌우로 움직여 본다. 다들 똑같이 그러는데 차이가 확연하다. 무엇이 저런 차이를 가져올까. 아무리 궁리해봐도 발과 손동작은 엉키고 엉덩이는 따로 논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깨를 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열정으로 순간에 집중한다. 땀이 뻘뻘 나기를 고대하며, 흥을 돋우는 추임새에 맞추어 있는 데로 몸을 비튼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야, 웃어라, 웃어!” 주문을 외우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코어 힘을 키워 올바른 자세를 만드는 게 목표다. 그렇게 한나절 줌바 스텝을 배우는데, 이런 수업은 사실 태어나 처음이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다. 내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내 사전에 없던 것들을 시도하는 게 줌바만이 아니니까. 동네 뒷산도 안 가던 내가 겨우 삼 개월 만에 두타산, 삼성산, 금산에 올랐고 다음 달엔 지리산에 갈 거고 언젠가는 공룡능선을 넘볼 참이니까. 옛날 같았으면 읽을 가치도 없다며 던져버렸을 금기였던 소설 나부랭이를 아주 열심히 읽고 있어보려고 하니까. 글쓴이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고심하고 끄적인다. 지금 읽고 배우며 느끼는 것이 달아나지 않도록 뭔가 잡으려고 애쓴다. 내게 없던 뭔가를 깨달아보려고 말이다. 

이 모든 건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라), 자유로운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 새로운 삶의 법칙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내 성격이다. 주어진 일에 확 몰입해 버리는 성향 때문이다. 때로 강박이 되기도 할 만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뭔가 불편하다. 대충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동시스템으로 깔려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해하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을 몰입하다 보면 오히려 속박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을 뭐 하러 갱년기에 그토록 열심을 내는지 어이없다.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피곤해 죽을 상을 쓰면서 왜 그럴까.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가. 조르바만은 이런 내 성향을 이해할 거다. 어떤 것에 몰입하면 확 빠져 버리는 성향 말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 즉 국가, 종교, 학교, 가족의 영향이 컸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도 국가도 정치도 다 그게 그거고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까. 인간을 둘러싼 이 모든 조건에서 벗어나 훌훌 자유로울 수 있냐는 말이다. 어떤 곳에서는 올바른 기준이 되어 좋다고 평가받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아주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정적 경험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조르바가 그랬다. 배움의 기회가 닿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행상을 하다, 국가를 위해 전쟁을 치렀고, 종교를 앞질렀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나쁜 짓 한 번 안 했는데 어쨌든 적이 되었으니 사람을 죽여야 했던 거다. 그런 뼈아픈 젊은 날의 경험은 국가와 정치, 종교, 가족을 떠나 내키는 대로, 현재를 최대한 즐기며, 열정을 갖고 살아야 하는 철학적 기반을 주었다.  불완전한 인간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마음껏 즐기며 열심히 자신의 행복에 몰입하며 사는 개똥철학이다. 


그러나 배운다고, 지식이 충분하다고 삶의 지혜가 터득될 수 있을까. 인간이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사람 마음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떤 테두리 안에 들어간다. 소속되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더 안정감을 얻고자 그 틀의 규칙을 따른다. 싫으면, 말고! 그렇게 되지 않고, 싫어도 해야 하는 거다. 

무엇이 옳다 믿었던 걸 의심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사람이 30년간 믿었던 종교를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뿌리치기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있었던 전쟁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을 것처럼 해놓고서는, 치매 걸린 엄마 생각 때문에, 공부 못하는 자식 생각을 하면서, 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또다시 종교적이 된다. “새벽기도 시간 이전에 눈을 뜨면 가겠어요.” 내가 하나님께 한 말, 그 말에 갇혀서, 새벽에 눈이 떠지면 교회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성도 한 명 없는 텅 빈 상가교회에서 목사가 혼자 설교를 하고, 사모가 빔을 쏜다. 나의 등장에 그들이 환해지는데, 의심 많은 이방인은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설교를 씹는다.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따진다. 왜 구원은 아직도 없는 거냐고 열심히 따진다. 리어왕을 읽고, 말조심하자고 다짐했으면서도, 답답한 코딜리아처럼, 직설을 해버린다. 내가 왜 회의론자가 되었는지, 다 말해버린다. 바보 같아 갑갑하다.  


조르바를 읽기 전에도 그랬다. 성가를 부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생판 모르는 교회에 가서, 성가대 봉사를 했다. 모두가 열심을 다해 손뼉 치며 찬송하고, 기도를 해도,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지는 않는다. 다시 절대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내 마음을 배반할 수는 없다, 안 믿어지는 걸 덮어놓고 믿는 건 이제 안 한다, 하는 거다. 그럴 거면 교회는 왜 갔나 싶은데, 성가대 봉사를 약속했으니까, 열심히 약속을 지키려 했다. 왜 나는 던지는 말을 붙잡는 진지형인가.   

기독교인이 된 사연 역시 그냥 한 번에 된 일이 아니었다. 내 삶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했다. 나는 평화를 얻고 싶었다. 신의 이름으로 찾아온 건 삶의 의미였다. 내가 의미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 믿음은 그 사랑은 죄에서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용서! 내가 미워하던 사람들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르바처럼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진정한 삶에 대한 갈증, 더 정확히는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삶, 심판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매일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신의 섭리 안에서 해석할 수 있었기에 나는 자유를 얻었다. 의미를 부여하면 열정이 따라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 신에게 맡겼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적어도 시도했고 몸으로 실천했으니 위안이 되었다.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주를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는 당연한 결과였다. 먹는 것이 비계나 똥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고, 에너지를 만들어 거룩한 곳에 쓰여야 했다. 그게 자유가 아니고 종교가 준 굴레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성의 방종을 막기 위한 합리적 신앙으로 제한된 자유였다. 의미 있는 삶이었다. 

자기 하고픈 대로 하는 조르바는 진정으로 자유를 얻었던가?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즉흥적인 감정을 따라 행동한다면, 진짜 자신이 속한 현장 그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중에 죽음 앞에서, 최후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 생을 살아 낼 수 있겠는가? 나는 계속 조르바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20대 시절 잠언의 성경 구절이 나를 따라다닐 때, 나는 조르바처럼 현실에 충실했다. 자연을 마음껏 즐겼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떠나기 전에, 시간이 그 감정을 앗아갈 것임을 알고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은 그때그때 저질렀다. 일단 저지르고, 이 길이 아니면, 하나님이 다른 길을 인도해 주시겠지, 하고 믿었던 거다.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다 신의 손안에 있다고 믿었던 믿음이 자유를 주었던 거다. 그래서 조르바가 종교를 싸잡아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때 국가를 위해 싸웠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터키인을 죽였다.... 신부도 죽이고, 그 자식들에게는 자선을 베풀고는 그걸로 구원받았다고 했다. 어처구니없어 보였다. 60세의 조르바는 32살의 청년 조르바에게서 벗어났다. 언제 어느 시점부터 그랬을까. 그래서 그는 이제 현재의 감각적 삶에 충실한다. 마음껏 춤을 춘다. 마음껏 여자를 안는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맘대로 사람 죽이고, 마을에 불 지르고, 성당에 불 지르면서, 아니, 주인공 두목을 속이고, 크레타 섬에서 사업한다 해놓고, 당신 역시 수도승을 농락하는데  그걸 자유라고 할 수 있나. 

나는 마음껏 반박하고 싶은데 그가 표현한 책 속의 종교의 모습이, 타락한 수도승의 모습이, 현대 사회에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살인을 저지르고 물질을 탐하는 수도승은 분명 지금 이 시대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면 사이비 종교이다.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자신이 속한 가족과 국가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지만, 역시 사고의 틀 측면에서 구속된다. 착하고 나쁜 사람? 이것도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그 틀을 주는 것 아닐까?


지금 나는 소설을 읽는다. 내 인생에 없던 소설을... 이 새로운 인생에...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거다. 수많은 인물을 만난다. 그 속에 빠져든다. 인물들이 나를 따라다닌다. 같이 사랑하고, 같이 화내고 방황한다. 짜증도 내다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조르바를 여러 번 곱씹어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타협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삶은 양면적이라고. 국가나 정치, 종교나 결혼이 내 맘대로 못 살도록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안정감을 주고 자유를 주기도 한다고. 


매일 내가 배우고 싶은 걸 즐기고, 가능하면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 순간에는 그 열정이 최선이었는데 지나고 보면 후회스러운 일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런 내게 조르바는 뭐라 할까? 지난 건 잊어버리고, 지금 최선을 다해 열심히 현재를 살고, 즐기라고 할까? 그렇게 살면 나는 최후의 심판,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진정으로? 최대한 열심히 질문하며 책을 읽는다. 글쓴이의 의도를 읽어내려 하며, 내 인생의 작가를 생각한다. 때로 기쁘고, 때로 슬프다. 그것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쨌든 조르바, 내가 다음에 또 뭔가를 경험하며 바뀌어 있더라도, 정식과 오식이 바뀌어 있다 하더라도, 놀라지는 않을 거다. 하여 그 마음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나와 차원이 다른 당신을 열심히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그러나, 우리 싸우지는 말고 그냥 웃자. 한 끝의 차이로 엉덩이가 씰룩쌜룩. 그러나 수 없이 많은 연습으로 그 한 끝이 만들어져  인생의 춤이 완성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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