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강렬한 인물을 설정할 수 있어야만 하는구나. 너무 세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햇빛을 정통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엊그제 읽은 <뼈의 기행>도 만만찮았는데, <햇빛 샤워> 역시 확실하게 각인되는 인물이다.
이런 주변인이 있었던가. 지금도 여전히 있던가.
전주에서 학교 다닐 때 야간 자율학습하고 돌아오는 주택 골목길이 무서웠다. 대로변에 인접한 주택으로 이사하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대학시절 잠실 시영아파트를 지날 때 재건축을 앞둔 곳이라 깔끔하지 않은 게 싫었다. 학교 후문으로 통했던 이화여대역으로 향한 주택길보다는 정문으로 나와 신촌역 가는 게 마음은 편했다. IMF로 이사하면서 굽은다리역 주택으로 이사했을 때 다시 전주 골목길 걷던 기분이 들었다. 나만 그랬을까. 골목 주변에서 광자 같은 인물을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백화점 입점 직원들의 삶은 어렴풋이 경험했다.
신촌의 한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잠시 보았던 사람들의 풍경. 직원 전용 쪽문으로 다니면서 밤샘 재고조사에, 진상 손님들 응대에, 백화점 관리자들의 갑질과 매출에 얽힌, 그리고 가방끈 짧은 열등감으로 대학 다니는 사람 후려쳐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잠깐 아르바이트하고 그만둘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햇빛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사람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의 급여체계 역시 박했다. 부자들이 마음껏 쇼핑하는 걸 보면서 흉내 내고 싶었던 걸까. 월급도 박한 그들이 마음껏 카드를 긁었다.
나는 여전히 후미진 골목이 싫고, 늦은 밤 이른 새벽 지하철역사를 걷는 것도 싫다. 그래서 재건축보다는 신도시를 택했나 보다. 모든 것을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도시는 어둠침침한 골목이 없으니까. 너무 오래 신도시 맛을 들였나. 그래서 내가 잠깐 잊었던 걸까.
햇빛이 필요한 사람들이 꼭 광자만은 아니란 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동교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좌절한 이들이 있고, 동교 같은 사람을 이용하려는 권력이 있고, 동교 같은 사람을 만나 모두가 행복한 선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이들이 있는데...
변두리 밑바닥 인생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삶이 없었으면 좋겠다. 돈이 없어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는 있는 사회적 구조는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결국 뛰어난 정치인을 뽑을 수 있는 비판적인 시민의식을 가진 대중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한 걸까.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교육은 어디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시민단체에서? 누가? 누가 동교를 죽게 한 걸까. 누가 광자를 미치게 한 걸까. 누가?
햇빛 있을 때 운동화 신고 뛰어나가 한 바탕 달리기를 하기에는 너무 덥다. 해가 져 캄캄할 때 그러나 도시의 불빛이 햇볕을 대신해 온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는 이 신도시에서 오늘 밤은 달리러 나가야겠다.